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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남 주기 좋아하고 다툴 일은 피했던 수줍음 많은 아이

등록 2015-04-12 22:27수정 2017-01-09 10:11

1917년 세브란스의전 졸업 앨범에 실린 산부인과수술 견학 장면으로, 뒤쪽 계단 첫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이희호의 아버지 이용기다. 지난해 연세대 제중원에서 앨범을 발굴해 확인해준 사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17년 세브란스의전 졸업 앨범에 실린 산부인과수술 견학 장면으로, 뒤쪽 계단 첫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이희호의 아버지 이용기다. 지난해 연세대 제중원에서 앨범을 발굴해 확인해준 사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평전] ② 제1부 학업시대
1회 어린 시절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일제 강점기 민족의식 일깨웠던
감리교 집안 두 남녀가 만나 결혼
위로 오빠 셋 두고 태어난 첫째딸
학교 못 다닌 게 한이었던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여자도 공부해야 해”

요리·양재 솜씨 좋은 어머니 따라
어려서부터 바느질·뜨개질 익히고
교회를 학교처럼 드나들며 자라

1922년 서울 외가에서 태어난 이희호는 인천 도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7살 때까지 인천에서 자랐다. 사진은 어머니(가운데), 여동생(영호·오른쪽)과 함께한 5살 때의 이희호(왼쪽)로 바느질 솜씨가 남달랐던 어머니가 손수 지어준 옷을 입었다.
1922년 서울 외가에서 태어난 이희호는 인천 도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7살 때까지 인천에서 자랐다. 사진은 어머니(가운데), 여동생(영호·오른쪽)과 함께한 5살 때의 이희호(왼쪽)로 바느질 솜씨가 남달랐던 어머니가 손수 지어준 옷을 입었다.
“나는 너무나 공부가 하고 싶어 사흘 동안 밥을 안 먹고 떼를 썼지만 여자애라고 학교에 안 보내주셨다.”

어린 시절 이희호가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이희호의 어머니는 집안 오빠들처럼 신식 학문을 배우고 싶어했지만, 그 시절 신식 학교에 다니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여자는 더구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집안에 갇힌 어머니는 오빠에게 한글과 한문을 익히고 영어도 조금 배웠다. 그 덕분에 성경책을 읽고 찬송가를 부를 수 있게 됐지만,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다. 결혼한 뒤 어머니는 그 한을 자식 교육으로 풀었고, 딸들에게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린 희호의 가슴속에 어머니의 한과 꿈이 스며들었다. 거기서 훗날의 여성 지식인, 여성 교육자, 여성 운동가 이희호가 자라났다.

이희호가 태어난 날은 3·1만세 사건이 나고 3년 반이 지난 1922년 9월21일이었다. 아기는 서울 종로 수송동의 외가에서 탄생의 첫울음 소리를 냈다. 종로1가 쪽에 있던 외가는 종로3가에 붙은 관수동 본가와 가까웠다. 이 여자아이의 출생일로부터 정확히 1년3개월 보름 뒤 반도의 서남쪽 끝에 붙은 하의도 바닷가에서 미래의 남편이자 동지가 될 사내아이도 태어났다.

아들만 줄줄이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첫딸을 얻자 무척 기뻐했다. 조부모도 손녀가 태어난 것을 반겼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이름을 남자아이들에게만 쓰는 돌림자를 넣어 ‘희호’(姬鎬)라고 지었다. 희호 위로는 오빠가 셋이었다. 또 희호 밑으로 두 살 아래 여동생이 태어나고 다시 남동생 셋이 뒤를 이어 모두 6남2녀의 대가족을 이루었다. 태어나서 며칠 안 돼 죽은 오빠와 어려서 세상을 떠난 동생까지 포함하면 모두 8남2녀였다. 이 형제들은 뒷날 이희호의 삶이 혹독한 정치적 풍파에 휩쓸릴 때 그 격랑에 함께 휘말리게 된다.

배움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이 이희호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다면, 모태신앙은 이희호의 혼을 키운 요람이었다. 이희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종교는 기독교, 그중에서도 감리교였다. 이희호는 감리교의 품 안에서 자랐고, 감리교에서 세운 여학교와 전문학교를 다녔고, 뒷날 감리교에서 마련해준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감리교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희호를 감싸고 있던 태반이었고, 이희호의 몸과 마음을 둘러싼 공기이자 문화였다.

그 감리교가 어떤 성향의 종교인지, 훗날의 남편의 말을 빌려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2002년 2월 대통령 김대중은 미국 대통령 조시 부시와 청와대에서 만났다.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여 한-미 관계가 몹시 삐걱거리던 때였다. 김대중은 만찬 도중 분위기를 풀려고 부시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종교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감리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가톨릭이고 내 아내가 감리교입니다.”

그러자 부시는 대통령 부인이 자기와 종교가 같다며 관심을 보였다. 김대중은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감리교가 한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영국 국내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나와 빈민이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로조건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폭동이 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위기에서 영국을 구한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가 시민의 뜻을 대변하는 자유로운 언론이고, 둘째가 약자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공정한 법원, 마지막이 바로 감리교였습니다. 존 웨슬리가 창시한 감리교는 시민들에게 정신적 위안과 안정을 주었습니다. 당시 성공회는 왕족과 귀족의 종교로서 사교그룹과 비슷했으나 대중들의 고통은 외면했습니다. 성공회가 외면한 사람들을 감리교가 품어준 것입니다. 감리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호하고 희망으로 이끌었습니다. 감리교가 영국 사회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부시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졌다. 감리교가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와 했던 일은 탄생지 영국에서 했던 일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특히 감리교는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1885년 서울에 온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정동의 자기 집을 열어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것이 한국 최초의 서구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기원이 됐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 온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도 아펜젤러에 이어 정동 자택에서 그해 9월부터 환자를 돌보았다. 정동병원이 거기서 태어났다. 1년 뒤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도 조선 땅을 밟아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화학당의 시작이었다. 이화학당은 뒷날 이화고등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가 됐다. 이희호는 이 두 학교를 차례로 나오게 된다.

감리교는 교인 양성보다는 사회 활동에 힘을 쏟았고 특히 민족의식을 키우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다. 감리교 민족운동은 3·1운동으로도 이어졌다. 민족 대표 33인 중 9명이 감리교인이었다. 3·1운동 때 23명이 집단학살을 당한 수원 제암리 교회가 감리교회였고, 또 감옥에서 순국한 유관순이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감리교를 비롯한 기독교가 민족의식 양성소 구실을 하자 일제는 뒤에 기독교를 집요하게 탄압했고, 신사참배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해 혼을 더럽혔다.

이희호의 집안이 언제부터 감리교인이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할아버지가 미국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쳤다고 하니까 그때 기독교를 믿게 된 것 같습니다.” 이희호의 말이다.

아버지 이용기는 1893년에 태어났고 어머니 이순이는 그보다 한 해 뒤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같은 이씨였지만, 본관이 달랐다. 아버지는 전주, 어머니는 연안이었다. 두 사람의 조상은 양쪽 다 대대로 서울 4대문 안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친구 여동생인 어머니와 1913년 관수동 집에서 멀지 않은 청계천 옆 수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식 혼례였다. 어머니의 집안도 감리교를 믿었으므로 두 감리교인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두 살 터울로 자식들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고향인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세브란스의학교를 1917년에 졸업한 뒤 서울의 종합병원 의사가 됐다. 선교사들이 미국 유학을 권했으나 아버지는 부모와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장남이었기에 유학을 단념했다. 아버지는 유학을 포기한 것을 오랫동안 애석하게 여겼다. 더 많은 공부에 대한 미련은 아버지한테도 있었다.

“타고난 성격은 내성적인데
교회서 노래·동화구연 하다보니
사람 앞에 서는 게 자연스러워졌죠”
한겨울 손발 터진 아이들한테
아버지 병원서 글리세린 퍼다 주기도

유치원 없어 1학년 두번 다니고
상급학교 진학 위해 6학년도 두번
초등 8년만에 이화여고 입시 합격

이희호의 아버지 전주 이씨 용기.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의 아버지 전주 이씨 용기.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의 어머니 연안 이씨 순이. 1913년 결혼해 슬하에 모두 8남2녀를 낳았다. 두 집안은 일찍이 감리교를 받아들여 개화한 덕분에 서울 수표교회에서 보기 드문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의 어머니 연안 이씨 순이. 1913년 결혼해 슬하에 모두 8남2녀를 낳았다. 두 집안은 일찍이 감리교를 받아들여 개화한 덕분에 서울 수표교회에서 보기 드문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아버지는 첫딸을 무척 예뻐했다. 아기를 버들고리에 눕혀 일터인 병원으로 데려가 곁에 두고 보았다. 이희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위생관념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냉수를 입에 대는 일이 없고 물은 꼭 끓여서 드셨습니다. 돈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기 때문에 돈처럼 더러운 것이 없다며 핀셋으로 집으셨어요. 융통성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머리는 참 좋아서 공부를 잘했고 수학에 아주 뛰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희호가 어렸을 때 인천 도립병원(경기도립 인천의원)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희호가 일곱 살 무렵 아무 연고가 없는 충청남도 서산으로 이사해 읍내에서 개인병원을 열었다. 시골의사 생활은 고생스러웠다.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다녔다. 그러나 벌이는 나쁘지 않아서 자식들을 두루 가르쳤고 생활 형편도 여느 집보다 나았다.

어머니는 2남2녀 중 셋째였는데, 학교를 다니지 못하자 다른 쪽에서 재능을 키웠다. 요리와 양재였다. 어머니가 자라던 수송동 집 인근에 숙명고등여학교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한테 뜨개질을 배웠다. 나중에는 강습회에서 음식 만드는 법도 익혀 그 시절엔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서양식 도넛이나 카스텔라를 간식으로 만들어줬다. 또 눈썰미가 날카로워 일본 아이들이 새로운 모양의 양복을 입고 나오면 눈여겨보았다가 집에서 똑같이 만들어 아이들에게 입혔다.

어머니의 손재주는 그대로 딸에게 이어졌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서 어려서부터 바느질과 뜨개질을 했는데, 상당한 수준에 올랐어요. 젊었을 적에는 내 옷을 직접 지어 입었고, 결혼한 뒤에는 세 아이의 옷도 만들어 입혔어요. 남편과 큰아들이 감옥에 가 있던 시절에는 수의를 직접 지어 교도소에 들여보내고 스웨터나 양말을 짜서 넣었지요.”

희호는 어머니 성격을 닮아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그 시절 겨울이면 아이들 손발이 터지다 못해 피가 날 때도 많았다. 희호는 아버지 병원에서 글리세린을 퍼다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글리세린을 바르면 손등의 핏기가 사라졌다.

희호는 남과 다투지 않는 성격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다툴 일이 생기면 입을 다물거나 자리를 피했다. 다만 바로 밑 여동생 영호와는 자주 토닥거리며 자랐다. 어느 집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영호는 집안 정리를 잘하는 살림꾼인데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어지르고 늘어놓는 편이었어요.”

희호가 아홉 살 때 항상 업어주고 예뻐하던 동생이 돌도 되기 전에 죽었다. 동생을 잃은 희호는 골방에서 그 시절 유행하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불렀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 곡조에 가사를 붙인 구슬픈 노래는 동생을 잃은 어린 희호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어머니는 서산에 이사 온 뒤 집에서 1㎞쯤 떨어진 서산감리교회(서산제일교회)를 다녔다. 어머니는 성실하고 믿음 깊은 신자였다. 희호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학교처럼 오갔다.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이면 이 작은 교회의 교인들은 직접 농사지어 얻은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감사예배를 드렸다. 어린 희호에게 가장 중요한 놀이터이자 배움터가 바로 교회였다. 여러 형제 중에서 희호가 가장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주일학교도 매번 나갔고 여름성경학교도 빼먹지 않았다.

“나는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이희호가 스스로 말하는 자신의 타고난 성격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며 사람들 앞에 나가 노래도 하고 동화 구연도 하고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는 성극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 앞에 서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지요.” 노래하는 이희호, 연극하는 이희호, 연설하는 이희호는 이때 틀이 만들어졌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내향적 성격을 뚫고 솟구치는 활동성이 두드러졌다. “그러다 유학을 다녀온 뒤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갔어요. 말수가 적어졌어요.” 도무지 나서지 않을 것처럼 잠자코 있다가도 한번 앞에 섰다 하면 다들 놀랄 정도로 제 몫을 하는 그런 성격이 어린 희호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일곱 살 희호가 학교생활을 시작한 곳은 서산공립보통학교였다. “초등학교(보통학교) 들어갈 나이가 안 돼서 어머니가 유치원에 보내려고 했는데 당시엔 서산에 유치원이 없었어요. 그래서 1학년을 두 번 다녔지요. 입학하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으니 그냥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 옆에 앉아 있었어요. 그만큼 어머니는 나를 놀리지 않고 가르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당시 서산공립보통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 1·2·3학년을 한반으로 묶고, 4·5·6학년을 다른 한반으로 묶어 가르쳤다.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넣고 둘둘 말아 어깨나 허리에 매고 다녔다. 점심으로 도시락 대신 누룽지를 싸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5학년 2학기 때부터 1년 동안 담임선생이 없었어요. 그러니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죠. 6학년 2학기 때에야 일본인 여성 야마구치 선생님이 새 담임으로 왔어요. 그때 선생님이 ‘상급 여학교 갈 사람은 손들어보라’ 하니까 손든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어요.”

어머니는 희호를 상급 학교로 진학시키겠다고 진즉부터 마음을 굳혔다.

“5학년 것과 6학년 것을 한꺼번에 배워야 하는데 학교 공부로 부족하니까 담임선생님이 하숙하고 있는 곳에 저녁마다 가서 배웠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으로는 서울에 있는 여학교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아 6학년을 한 번 더 다녔습니다. 그래서 결국 초등학교를 8년이나 다닌 셈이 됐지요.”

어머니가 돌봐주고 마음을 쓴 덕에 희호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훗날 이화고녀)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열다섯 살 희호는 1936년 봄 서울로 향했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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