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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이희호 “이화고녀 4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 회상

등록 2015-04-19 20:55수정 2017-01-09 10:11

1936년 입학해 서울 정동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지낸 이화고녀 4년간은 이희호에게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 있다. 40년 졸업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상급학교 진학이 2년이나 늦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진은 이화여전 입학 준비를 하던 41년, 이화고녀 동문들이 마련한 영어 교사 ‘미스 처치’의 미국 환송 행사에서 통치마에 저고리를 입고 달리기 시합에 출전한 이희호의 모습.(앞줄 오른쪽 넷째 단발머리)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36년 입학해 서울 정동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지낸 이화고녀 4년간은 이희호에게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 있다. 40년 졸업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상급학교 진학이 2년이나 늦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진은 이화여전 입학 준비를 하던 41년, 이화고녀 동문들이 마련한 영어 교사 ‘미스 처치’의 미국 환송 행사에서 통치마에 저고리를 입고 달리기 시합에 출전한 이희호의 모습.(앞줄 오른쪽 넷째 단발머리)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평전] ③ 제1부 학업시대
2회 이화의 사춘기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9번째 이야기다.

이희호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평전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하면서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른다. 이희호 이사장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평전은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와 관련 서적, 지인들의 증언을 두루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1936년 이화고등여학교 입학
이화학당 창립 50돌 기념 연극
1학년때 극본·연출·주역까지

우스갯소리로 친구들에 웃음 안겨
2학년때부터 계속 반장에 뽑혀
털털하고 직심스러운 성격에
남들이 기피하는 일도 묵묵히 해내

서울 정동 덕수궁 옆에 있던 이화고등여학교(이화고녀)는 전국에서 올라온 여학생들의 삶터였다. 지방 학생들은 대개 기숙사에서 살았다. 기숙사는 팔도 사투리로 시끄러웠다. 이희호의 귀에 자주 들린 건 북쪽 사투리였다.

“당시 이화고녀 학생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 출신이 많았어요. 서울 학생도 꽤 있었고요. 기독교가 처음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인지 북쪽이 먼저 개화가 돼서 그랬던가 봐요. 반면에 충청도·경상도·전라도는 당시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여자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적었어요. 남쪽에서 온 학생은 한 학년에 대여섯명이나 있을 정도였지요.”

1936년 이희호와 함께 입학한 학생은 120명이었다. 120명을 60명씩 두 반으로 나누었다. “입학생 대다수가 졸업할 때까지 다녔어요. 중도에 그만둔 학생이 거의 없었지요.”

이희호는 이 학교에서 먼저 연극 재능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됐다. 어려서 교회에서 했던 연극 활동 덕에 무대에 서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1936년은 마침 이화학당 창립 50돌이 되는 해였다. 1학년인 이희호는 극본을 쓰고 연출하고 주역을 맡아 5월31일 창립 50돌 기념 무대에 올랐다.

“어떻게 1학년인 내가 그 모든 걸 다 했는지 모르겠어요. 정동 한울타리 안에 있던 이화여전이 한해 전 신촌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생긴 공백 때문에 1학년 학생에게까지 기회가 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희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커지고 나중에는 직업 연극인 못지 않은 연기력으로 사람들의 환호와 찬사를 받게 된다. 연기는 세파와 풍상으로 표정이 굳어진 훗날의 정치인 아내 이희호를 생각하면 선뜻 떠올리기 어려운 젊은 날의 재능이다.

이희호는 1940년 이화고녀를 졸업하며 받은 ‘종교상’을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사진은 졸업식 때 은사들과 함께 찍은 것으로 앞줄 오른쪽 첫째가 이희호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1940년 이화고녀를 졸업하며 받은 ‘종교상’을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사진은 졸업식 때 은사들과 함께 찍은 것으로 앞줄 오른쪽 첫째가 이희호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친구들을 웃기는 여학생’은 그 시절 이희호의 또 다른 면모였다. 10대 소녀 이희호는 요즘 말로 하자면 ‘개그우먼’의 끼를 한껏 발산했다.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이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특히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기숙사 합동 생일잔치는 ‘개그우먼 이희호’의 무대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우스갯소리를 했다.

“선교사가 수탉을 잡아서 산 채로 털을 뽑다가 그만 닭을 놓치고 말았어. 그 선교사가 우리말을 잘 못해. 그래서 뭐라 했냐면 ‘혹시 병아리 아버지 옷 벗고 왔다 갔다 하는 거 봤어요?’”

친구들이 깔깔거리고 좋아하면 이희호의 기분도 좋아졌다. 연극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우스갯소리로 즐겁게 해주니 동급생들이 자연스럽게 이희호를 따랐다. 이희호는 2학년 때부터 반장으로 계속 뽑혔다. 이희호가 보인 리더십은, 굳이 분류하자면 ‘솔선수범형’이었다. 무던하고 무심한 듯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을 보살펴주고 남들이 피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이희호와 이화고녀 동창인 이규임의 회고다.

“기숙사 친구 중에는 이상한 냄새가 나거나 이를 몹시 갈아 한방 쓰기를 꺼려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도 희호는 묵묵히 한방을 써주었다. (…) 때로는 급한 사정으로 기숙사를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될 학생이 있었다. 그런 경우 하는 수 없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처녀로서는 남과 한 침대를 쓴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고역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희호는 말없이 했다.”

통치마에 저고리 입고 다니다
4학년 때에야 세일러복 입게 돼
단발머리로 바꾸기 위해 아버지에 편지
“평생의 소원이니 허락해주시기를”

이규임은 다른 일화도 전한다.

“근로봉사 시간이라고 해서 교외에 나가서 일을 하기도 했다. 언제인가 덕수궁 연못을 청소할 때였다. 그런 경우 대강대강 하고 시간을 때우기 마련인데, 이 친구는 뻘뻘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닦아가며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털털하고 직심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다.”

‘직심’(直心), 이규임이 쓴 이 단어에 에둘러 가지 않는 이희호의 성격이 집약돼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 그것이 그 시절에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한 이희호의 특징이었다.

정동에서 보낸 여학교 시절은 나라 잃은 겨레 전체로 보면 암울함이 짙어지는 때였지만 10대 중반을 넘어가는 소녀들에게는 꽃 같은 청춘이었다. 이희호는 여학교 4년의 시간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이희호가 입학할 때 입은 교복은 통치마에 저고리였다. 머리는 길게 땋아 댕기를 드렸다. 그렇게 3년을 다니다가 4학년 졸업반 때 통치마와 저고리 대신에 여학생들의 소망인 세일러복을 입게 됐다.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또 댕기머리를 자르고 단발머리를 할 수 있게 됐는데, 다만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이희호는 아버지에게 ‘평생의 소원이니 단발을 허락해 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냈다. 아버지는 ‘단발을 허한다’는 답장을 보내주었다. “나중에 보니 부모의 허락을 받고 머리를 자른 학생은 나 말고 없었어요.” 여기서도 어딘지 순진하고 곧이곧대로 하는 그 시절 이희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숙사를 나와 바깥바람을 쐬는 주말 외출은 여학생들에게 특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이 백화점이었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미쓰코시백화점, 또 종로에 있던 화신백화점은 온갖 신식 물건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이희호는 백화점 진열대의 네모난 가죽가방이 몹시 갖고 싶었지만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절 백화점은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에 포함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화신백화점의 움직이는 계단은 놀라웠다. 그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어본 것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두고두고 자랑거리였다. 이희호와 친구들은 전차를 타고 명동으로 나가기도 했다.

3학년 가을에는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1만2000봉’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걸음이 빨라 맨 앞에 서서 올라갔어요.” 비로봉에서 바라본 금강산은 단풍으로 물든 붉은빛의 바다였다. 학생들은 중턱에 있는 표훈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려와 외금강의 온정리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다. 이희호는 그 시절로부터 거의 70년이 지난 2007년 8월에 금강산을 다시 찾았다. 1998년 ‘국민의 정부’ 때 금강산 관광길이 열린 덕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올랐던 금강산을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에 앉아서 바라보았다. 1만2000봉이 그대로였다. 금강산 가는 길은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다시 막히고 말았다.

그 3학년 2학기 때 이희호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험을 거부하고 백지로 내는 이른바 ‘백지동맹’이었는데, 표적이 된 선생은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메리 처치였다. 어느 날 4학년 상급생 반장이 3학년의 두 반장을 불러 “내일 영어시험을 보이콧하기로 했으니 백지로 내라”고 했다.

“반장으로서 학급의 뜻을 물어야 하잖아요. 급우들에게 물어보니까 다들 ‘옳소, 옳소’ 하며 좋아서 야단이에요. 그래서 백지동맹을 하기로 했죠. 다음날 아침 신봉조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강당에 다 모이라고 하더라고요. ‘미스 처치가 청춘을 바쳐서 너희들을 가르쳤는데 그럴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A, B, C, D라도 써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A, B, C, D…를 써내긴 했지만 결과는 백지로 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에 저항하는 선교사들을 눈엣가시같이 여겼다. 메리 처치는 1929년부터 이화고녀 교장으로 있다가 총독부 압력을 받아 1938년 자리에서 물러나 영어를 가르치던 미국 선교사였다. 독신이어서 다들 ‘미스 처치’라고 불렀다.

“백지동맹은 교장직에서 물러난 미스 처치를 더욱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누군가가 사주해 일으킨 사건이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갔던 거지요. 훗날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일파 선생이 뒤에서 시킨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이 일로 이희호는 반장을 그만뒀다. 학교에서는 “4학년 때도 반장을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으나 4학년이 되자 급우들이 다시 반장으로 뽑아주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인정해주지 않아 반장 일을 하지는 못했다.

백지동맹은 이희호에게 뼈저리게 아픈 사건으로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지동맹으로 몰아내려 했던 미스 처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학생이 이희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2학년 때 미스 처치가 학생 서너 명을 교장실로 부르더니 나더러 기도를 해보라고 했어요. 이때 여러 사람 앞에서 하는 ‘공중기도’를 처음으로 했지요.” 그 후 이희호는 매주 수요일 저녁 기숙사 예배의 사회를 보았고, 외부에서 기독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학생 대표로 참석했다. 그렇게 특별히 아껴주었던 사람에게 못된 짓을 했던 것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독신 선교사가 은퇴 후 기거하는 시설이 두 군데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처치 선생님도 거기 계셨을 텐데 여러 일들에 치여 찾아가 뵙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어요.”

1938년 이화고녀 3학년 2학기 때 반장을 맡고 있던 이희호는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이른바 ‘영어시험 백지동맹 사건’에 가담했던 일을 후회스러운 기억의 하나로 꼽는다. 미국 감리교단에서 파견한 선교사 출신의 영어 교사 메리 처치는 29년 이화고녀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38년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야 했다. 독신이어서 ‘미스 처치’로 불린 그는 다시 평교사로 헌신했다. 사진은 1924년 이화학당 시절 교사들로 둘째 줄 왼쪽 넷째가 ‘미스 처치’.  이화여대 제공
1938년 이화고녀 3학년 2학기 때 반장을 맡고 있던 이희호는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이른바 ‘영어시험 백지동맹 사건’에 가담했던 일을 후회스러운 기억의 하나로 꼽는다. 미국 감리교단에서 파견한 선교사 출신의 영어 교사 메리 처치는 29년 이화고녀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38년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야 했다. 독신이어서 ‘미스 처치’로 불린 그는 다시 평교사로 헌신했다. 사진은 1924년 이화학당 시절 교사들로 둘째 줄 왼쪽 넷째가 ‘미스 처치’. 이화여대 제공
여학교 시절 이희호는 성적이 “그저 상위에 속하는 정도”였다. “한 반 60명 중 10등 안에 들었죠. 아버지를 닮아서 수학을 잘했는데, 수학은 공식을 외우면 되니까 쉬웠어요.”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건 학교 공부보다는 교회 활동이었다. 졸업할 때 우등상은 받지 못하고 개근상과 함께 종교상을 받았다. 신앙심이 깊고 종교생활에 모범이 되는 학생에게 주는 상이었다. 이 종교상을 세 명이 함께 받았는데, 이희호는 그 상을 “이제껏 받은 모든 상 중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소중한 상”으로 간직했다.

이희호는 졸업반 시절 ‘무엇이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공부를 더 많이 해서 김활란 박사처럼 되자’고 결심했다. 당시 김활란은 젊은 여성들에게 선망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학 졸업자로서 미국에 유학해 ‘여성 박사 제1호’가 된 인물이었다. 또 1939년 앨리스 아펜젤러 교장에 이어 이화여전 교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여성 지식인의 둘도 없는 표상이 됐다. 일제협력으로 생채기가 나기 전의 김활란은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슴 뛰는 증거였다.

졸업을 앞두고 이희호에게 커다란 근심거리가 생겼다. 고향의 어머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어느 날 저녁 교회에서 불을 때던 전도사의 딸이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탓에 온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예배를 보던 어머니는 그 무서운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허겁지겁 밤길을 달려와 아버지를 데리고 교회로 갔다. 전도사의 딸은 화상이 극심했다. 그 뒤로 어머니는 “한쪽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나고 얼굴 반쪽이 꼭 불에 데어 회초리로 맞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병이 깊어지면서 “저기 불에 탄 귀신이 나를 오라고 한다”고 자주 헛소리를 했다.

평소에 그토록 딸의 공부를 독려했던 어머니는 병석에 누운 채 진학을 앞둔 딸에게 말했다. “졸업하고 1년만 내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이희호는 전문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중단했다. 이화고녀 졸업식장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어머니의 병환에 대한 걱정과 진학의 꿈을 접어야 하는 데 따른 설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희호는 어머니를 간병하러 곧장 서산 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1년을 앓던 어머니는 딸이 집으로 내려간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40년 3월24일이었다. 막내 동생이 아홉살이었다. 마흔여덟에 혼자가 된 아버지는 홀로 희미한 목소리로 ‘클레멘타인’을 불렀다.

이희호는 어머니를 잃고 한동안 깊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교회가 유일한 의지처였다. 어머니가 하던 살림을 떠맡아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해 가을쯤에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를 잊을 수 없었던 큰딸은 아버지의 재혼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실망감을 쏟아냈어요.” 그러나 결국엔 새어머니를 받아들였다.

집안 살림 의무에서 벗어난 이희호는 이듬해 입학시험을 준비하려고 서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이희호는 그때 ‘결혼하지 않는다’, ‘건강을 지킨다’, ‘공부를 많이 한다’는 세 가지 약속을 속으로 했다. “‘결혼하지 않는다’는 건 독신주의를 고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학업을 마칠 때까지 결혼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지요.” 이희호는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린 스무살 이희호의 앞으로 고단한 날들이 밀물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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