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설 연휴 마지막 날인 1월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영수 특검 사무실로 조사받기 위해 소환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다시 한 번 ‘완벽한 탈출’을 꿈꾸는 걸까요. 문화예술계를 넘어 한국사회 전 분야 ‘블랙리스트’를 작성·관리한 혐의(직권남용 등)로 구속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달 31일 ‘나에 대한 피의사실은 특검법상 수사 대상이 아니다’라며 서울고등법원에 이의신청을 제기했습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특검법 제2조에 따른 수사 대상에 명백하게 해당한다”고 반박했습니다. 특검법 제2조15항은 공무원 불법 인사조치 등 법률에 명시된 ‘최순실 게이트’ 14개 의혹 수사과정에서 ‘인지된 사건’까지 수사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이의신청 접수 48시간 내인 3일 오전 11시까지 판단을 내릴 예정입니다.
기시감이 듭니다. 김 전 실장은 25년 전인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관권선거 개입 방안 등을 논의해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습니다. 그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입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까지 지낸 그였지만, 유죄 확정땐 변호사 등록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백척간두의 순간, 그는 ‘법꾸라지(법률 미꾸라지의 줄임말)’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첫 공판을 앞두고 1993년 3월17일 대통령선거법 제36조1항(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과 처벌 조항(제161조)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을 신청했습니다. 이 법률 조항들이 선거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운동을 포괄적으로 금지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 참정권 등을 과잉제한한다는 겁니다.
1992년 12월11일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굴뚝 바로 왼쪽 코트차림 남자)이 대책회의를 마치고 초원즉석복국집에서 나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법꾸라지’다운 선택이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해 4월14일 열린 첫 공판에서 검찰은 그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습니다. 4월27일 서울형사지방법원이 김 전 실장의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받아들이자 재판은 바로 중단됐습니다. 이듬해 7월29일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김 전 실장에 대한 검찰의 공소는 취하됐습니다. 그는 헌재 결정이 나오기 전인 1993년 10월 이미 변호사 등록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당시 변호사 100여명은 “정치검사의 변호사 개업을 반대한다”는 집단성명을 냈기도 했죠.
당시에도 ‘법꾸라지’를 보는 시선은 차가웠습니다. 1993년 3월20일치 <동아일보>는 김정훈 기자 기명칼럼에서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정치권 등에서 이미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 위헌 소지가 크다고 지적돼왔다”면서도 “김 전 장관이 이를 문제삼고 나선 것은 면소 내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유난히 선거 관련법의 엄정한 집행을 강조한 그가 막상 이 법률이 자신에게 올가미로 다가오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짧은 변호사 시절을 거쳐 3선 국회의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이어지는 ‘김기춘 제2의 인생’ 서막이 올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015년 1월15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 정부 업무보고 경제혁신 3개년 계획 회의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모두 발언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탈주’를 꿈꾸는 그에겐 안타깝게도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구체적인 행적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1월25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9차 변론에 증인으로 나와 “김기춘 전 실장이 정부 비판세력에 대한 응징 또는 불이익을 끊임없이 요구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유 전 장관의 후임인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등의 공소장을 보면, 2014년 1월 김 전 실장이 수석비서관들에게 ‘뿌리 깊은 좌파 척결에 불퇴전의 각오로 투지를 갖고 싸워나가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손에 ‘블랙리스트’를 쥔 김 전 실장은 동시에 보수우익단체 지원에 나서, 구체적인 액수까지 적은 ‘화이트리스트’를 전국경제인연합에 전달했습니다.
이제 24시간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25년 전의 성공을 되새김질하고 있을 김 전 실장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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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