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홍보 만화 <요즘 간첩 이야기> 3권의 한 장면
국가정보원이 최근 발간한 자체 홍보물에서 간첩조작 사건과 시민사회단체의 국가보안법 철폐 요구 등을 국내 법의 허점을 이용한 자작극이나 북한 지령을 받은 것처럼 심각하게 왜곡·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인사들이 참여한 국정원 개혁 발전위원회(위원장 정해구)를 만들어 ‘적폐청산’을 추진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개혁에 저항하는 국정원 내부의 생존 논리가 작동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런 홍보물을 배포한 시기는 문재인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12년만에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식에 참석해 북한을 향한 대화 메시지를 던진 날이었다.
국정원은 지난 15일 홈페이지에 <요즘 간첩 이야기 3>이라는 홍보물을 올렸다. 국내에 활동하는 남파간첩들을 주인공으로 간첩 및 국내 이적단체의 활동 방식, 국가보안법 필요성 등을 만화 형식을 빌려 알리는 ‘계도물’이다.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때인 2015년 12월 <요즘 간첩 이야기> 1편을, 지난해 6월에는 2편을 발간했다. 촛불 집회와 대통령 탄핵, 9년 만의 정권 교체를 거쳐 1년 만에 후속작을 내놓은 것이다.
내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간첩 혐의로 붙잡힌 피의자(만화에서는 실제 남파간첩으로 설정) 2명이 철창 안에서 편하게 짜장면을 먹고 있다. 밖에서는 “간첩조작 웬말이냐, 고문이 웬말이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가 진행 중이다. 간첩 피의자가 “자유가 넘치는 민주주의국가 아니냐. 게다가 밖에서는 저렇게 우리를 위해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며 “이게 다 우리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영도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법정에 나가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자해투쟁’을 하자”고 제안한다. “고문 때문에 조작된 거라고 우기면 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단체들을 북한의 지령을 직접 받아 움직이는 단체들로 묘사한 장면은 특히 심각하다. 평양에서 “남조선에 암약 중인 혁명애국세력 동무들은 더욱 가열차게 투쟁하라”고 지령을 서울로 내리자, 간첩조작 규탄 집회를 하던 이들이 모여 “당에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담당 경찰들을 인권탄압, 직권남용 등 온갖 명목으로 고발해 위축시키자”, “사건의 실체보다 주변 문제로 분위기를 바꾸자”, “이를 계기로 국가보안법 철폐운동도 재개하자”는 ‘모의’를 한다.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보이는 곳으로 만화의 컷이 바뀌면, 북한 지령을 받은 이들이 국가보안법 철폐 집회를 하고 있다. “광장에 있는 시민들에게 외쳐봅시다. 통일을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고 구호를 외치고 서명운동을 진행하자, 지나가던 젊은이들이 “이적단체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자기네 말로는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북한을 추종하고 지령을 받아 이적활동을 하고 있다”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는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증거조작 사실 등이 드러나 법원에서 무죄로 판명 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조작 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마치 간첩들이 이런 식으로 무죄가 났을 뿐 조작이나 무리한 수사는 없었다는 식이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국정원 수사 기능 폐지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 △간첩조작·종북몰이에 연루·가담한 조직과 인력에 대한 책임 추궁 등을 약속했다.
국정원 개혁 발전위원회가 적폐청산과 함께 추진하는 ‘조직쇄신’과 상충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대공수사를 위해 ‘휴대전화 감청권’이 필요하다고 부추기는 대목이다. 마약 판매 혐의로 조사받던 간첩이 묵비권을 행사하자, 수사기관은 마약 판매상과의 통화내역을 증거로 제시한다. 무거운 처벌을 걱정하는 간첩에게 선배 간첩이 “남조선은 네가 통화한 내용을 전혀 들을 수 없다”며 여유를 부린다. “그럼 수사를 어떻게 하느냐”는 후배 간첩의 질문에 “유선전화는 법원 허가를 받아 감청할 수 있지만 휴대전화는 장비가 없어 감청 자체를 할 수가 없다. 걱정하지 말라”며 여유를 부리는 식이다.
민간인 사찰 등 기본권 침해 우려, 정치적 악용 가능성, 통제 장치 미비 등에 대한 논란, 국가안전기획부 엑스파일 사건 등 불법 도감청 전력 등 ‘맥락’은 쏙 빠졌다. 국정원은 테러 정보 수집 등을 위해 휴대전화 감청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문 대통령이 폐지·이관을 공약한 ‘대공수사용’이 대부분이다. 그 필요성을 두고 사회적 논의와 정치적 토론·합의가 요구되는 사안인데도 국정원 예산을 써가며 일방적 홍보만 하고 있는 셈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