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농지를 매입한 뒤 자신이 대주주인 회사에 팔아 조성한 골프장의 전경. 누리집 갈무리
재벌그룹 회장님이 “경운기 1대”를 사서 “고추 농사”를 짓겠다?
재벌 일가가 ‘농사를 짓겠다’고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해 농지 구입 허가를 받은 뒤 자신이 대주주인 골프장 개발 법인에 땅을 넘겨 골프장을 만드는 편법 행태로 헌법의 경자유전(농사를 짓는 자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 원칙을 훼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이 춘천시 등으로부터 확보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농지취득자격증명신청서, 농업경영계획서 등 관련 서류를 보면 이같은 행태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 전 회장은 태광산업 회장 재직 시절이던 2005~2007년 춘천시 남산면 일대 27만㎡의 농지를 순차적으로 구입했다. 농지는 헌법의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농민이나 농업 법인만 매입할 수 있고 개인이 주말농장 등을 위해 취득할 수 있는 토지는 1000㎡ 미만이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 전 회장이 수십만㎡의 농지를 구입할 수 있었던 건 농업경영계획서를 제출하며 농지취득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5년 이 전 회장은 남산면 농지에서 “2006년 2월부터” “벼”농사를 짓겠다고 신고했다. 노동력 확보 방안은 위탁이 아닌 “자기 노동력”과 “일부 고용”으로 하겠다고 했다. 2007년에 제출한 인근 농지에 대해서는 “고추” 농사를 “자기 노동력”과 “일부 고용”으로 짓겠다고 신고했다. 이 전 회장은 “경운기 1대, 관리기 1대”를 구입할 계획도 적시했다. ‘향후 영농 여부’에 대해선 “계속 영농”이라고 이 전 회장은 적었다. 이렇게 농지취득자격을 획득했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한 농업경영계획서.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 제공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한 농업경영계획서.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 제공
동시에 이 전 회장은 자신이 대주주인 동림관광개발(동림)이 이 땅에 골프장을 짓는 절차에 착수했다. 동림은 이 전 회장(51.02%)을 포함해 그의 일가가 지분을 100% 소유한 회사다. 땅 주인인 ‘농민’ 이 전 회장의 토지 사용 승낙을 전제로 동림은 이 땅을 골프장 부지로 바꾸겠다고 신청해 2009년 6월 지자체로부터 전용 허가를 받아냈다. 직후인 2009년 7월 이 전 회장은 땅을 동림에 넘겼다. 108억9000만원에 사서 동림에 110억2000만원에 팔았다. 이 전 회장이 ‘고추’를 심으려 했던 해당 땅은 2012년 6월 골프장으로 준공돼 가치가 크게 상승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 회장은 땅의 원주인으로부터 골프장 건설을 위한 매입에 나섰을 경우 예상되는 매입 가격 상승과 절차적 난항을 해소한 채 손쉽게 골프장을 자신의 개인 회사를 통해 완성할 수 있었다. 골프장 회원권을 분양이 이뤄지기도 전인 2008년 6월 ‘우선 분양권 매매’ 형식으로 태광 계열사 흥국생명에 220억원에 판매한 것은 ‘덤’이었다.
이 전 회장은 동림에게 땅을 넘기기 전 잠시라도 고추 농사를 지었을까? 이에 대해 이 전 회장 쪽은 황주홍 의원에게 “실제 농업을 경영하기 위해 농지를 취득했으나 농업전문가가 아니어서 농사를 짓기가 쉽지 않았고 잘 되지 않았다”라며 “일부를 농지은행에 임대했고 지역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사용하게 했다”고 말했다. ‘자기 노동력’으로 신고한 것과 달리 위탁을 했다는 것이다. 취득한 27만㎡의 농지 가운데 계약서 등으로 위탁이 그나마 입증되는 농지는 3만㎡에 불과하다.
효성그룹의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도 이 전 회장과 비슷한 수법으로 골프장을 지어 올해 12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조 전 부사장 역시 농사를 짓겠다며 1999년 이천의 농지 2만6000㎡를 구입했다가 조 전 부사장 등 효성 아들 삼형제가 지분을 100% 보유하던 두미종합개발에 넘겼다. 심지어 이 농지는 효성그룹 ‘형제의 난’ 송사 과정 중 지난해 서울고법에서 “(조 전 사장 부친인)조석래 회장이 매수해 명의만 돌린 것”이라고 판단된 바 있다.
황 의원은 “농지취득 승인 뒤 실제 농사 여부는 ‘임의 선정’으로 조사하기때문에 실효성이 낮고 법 위반 처벌 공소시효도 5년에 불과해 책임을 묻는데 한계가 있다”라며 “시효를 늘리고 최근 5년 사이 골프장으로 전용허가된 농지 30건에 대해서 전수조사를 벌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