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988년 11월2일, 5공비리 청문회 시작
일해재단 비리, 5·18 광주 진상 등 조사
‘명패 사건’ 노무현 활약 청문회 내내 이어져
국정사상 최초의 청문회가 생중계되자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시민들이 모여들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29년 전 오늘, 1988년 11월2일 헌정 사상 최초로 5공 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 청문회의 핵심은 일해재단 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언론기관 통폐합 문제 등의 진상 조사를 통한 부정부패의 척결이었다. 청문회는 생중계되어 수많은 국민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에도 불구하고, 신군부 출신의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국민 직선제를 통해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이듬해 4월26일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의 참패로 사상 초유의 여소 야대 국회가 되었다. 곧이어 열린 청와대 4자 회담에서 노태우는 88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해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협조를 구했다. 이에 3김은 양심수 석방과 ‘5공 비리’ 청문회 문제를 요구했다. 이 합의에 따라 ‘5공 비리 특위’가 구성되었다.
노태우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신군부다. 제5공화국 시대의 비리와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그해 9월17일 개막하는 88 서울올림픽에서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과 나란히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전두환과 나란히 앉은 모습이 TV에 나가면 국민들이 5공과 자신을 한통속으로 보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청문회는 올림픽이 끝난 뒤인 1988년 11월 2일 막을 올리게 된다. 물론 노태우는 이로부터 8년 뒤 반란죄, 내란죄, 수뢰죄 등으로 전두환과 함께 나란히 법정에 서게 되고, 1996년 4월17일 대법원에서 전두환(무기징역)과 함께 징역 17년을 선고받는다.
전두환씨가 '광주' 증언중 '자위권' 운운하는 발언을 하자 야당 의원들이 일제히 고함을 치는 등 장내가 소란한 틈을 타서 이철용 의원(평민당)이 증언대까지 다가가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
5공비리 청문회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 전두환이 퇴임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열렸다. 모든 국민의 관심은 5공화국의 핵심 인물인 전두환의 증인 출석 여부에 쏠렸다. 하지만 전두환은 국회에 출석해 증언이 아닌 일방적인 연설을 하는데 그쳤다. 심지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을 향한 군의 발포 사실에 대해
“본인은 (중략) 통치권자로서 (중략) 광주는 자위권 발동으로...”
라고 변명했다. 듣다 못한 의원들이 거센 항의가 이어졌다. 정상용 평화민주당 의원은 “자위권 발동이 뭐야? 발포 명령자 밝혀!”라며 단상으로 뛰쳐나갔다.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도 “살인마 전두환”을 외쳤다. 순간 의원들 간의 설전과 몸싸움이 이어졌다. 바로 그때 당시 통일민주당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민주정의당 의원들에게 소리 질렀다.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이 틈을 타 전두환이 퇴장하려 하자 노무현 의원은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던졌다.
5공청문회-1989년 노무현 김상현(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노무현
이른바 ‘명패’ 사건으로 청문회의 일약 스타가 된 노무현 의원의 활약은 청문회 내내 이어졌다.
5공화국 청문회 노무현과 정주영의 대화노무현 :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이 힘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간다는 그러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정주영 : …… (침묵)
노무현 : 그것을 단순히 현상유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좀 더 성장하기 위해 힘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까?
정주영 : 힘 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면 괴로운 일을 당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영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노무현 : 혹시 그 순응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정주영 : 능력에 맞게 내는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 일해가 막후권부라는 것이 공공연히 거론되기 이전에는 묵묵히 추종하다가 그 권력이 퇴조하니까 독자적인 견해,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주영 : …… (침묵)
노무현 : 왜 돈 문제가 아니라면 진작부터 6·29 이전부터 바른말을 하지 못했습니까?
정주영 :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노무현 : 이렇게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없을 때는 권력과 멀리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습니까?
정주영 : …… (침묵)
일해재단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고 정주영 회장 정주영(현대그룹 회장)씨가 국회 5공 비리 일해재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 증언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청문회가 끝난 이듬해 노무현 의원이 사회단체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의 정경유착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체로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하는 재벌들 인상을 보면 표정이 두 가지예요 . 하나는 자기도 억울하게 뺏겼다는 것이고 , 하나는 내가 번 돈 내가 주었으니 억울해도 내가 억울한 일인데 왜 모두들 그렇게 말들이 많으냐는 표정입니다 . 여러분 , 과연 재벌이 낸 돈이 자기들 돈입니까 ? 정말 주기 싫은 돈을 억울하게 빼앗긴 겁니까 ? 여러분 , 별로 복잡하게 따져 보지 않아도 재벌들이 낸 돈은 모두 우리 서민들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입니다 . -1989년 재야나 사회단체에서 강연한 내용 중-
국회 일해청문회 대질심문에서 증언하는 정주영.장세동.양정모씨(오른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장세동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한 핵심 인물이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 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한 신군부 전두환의 최고 충신이었다.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
장세동은 5공비리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달라며 전두환의 총알받이를 자처해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반면, 노무현 의원의 집요한 질문에는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5공화국 청문회 노무현과 장세동 대화김옥길
1979년 문교부 장관에 임명된 인물로 5공 청문회 핵심 증인 중 한 명이다.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때 국무회의 찬반 토론은 없었다. 이 회의에서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김옥길 문교부 장관이었다. 김옥길은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고 얘기했는데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비상계엄론을 밀어붙여 김옥길의 설명 요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옥길은 문교부 장관직에서 경질되었다.
5.17 쿠데타의 진상 김옥길 89년 청문회 증언
참고문헌
노무현사료관 공식 누리집
<대통령 이야기 > 강준식
<김대중 vs 김영삼 >/ 이동형
<서중석의 현대사이야기 >/서중석 , 김덕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