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경험 중 하나로 한국전쟁 당시의 장진호 전투가 꼽힌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미군(유엔군)은 함경남도 장진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규모 인해전술에 포위되었는데,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까지 겹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참혹했던 무대인 장진호가 자연 지형이 아니라 인공 호수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엽, 장진에 살던 주민들이 경성(서울)으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온 일이 있었다. 군수와 경찰서장이 나서서 장진 일대의 토지를 헐값에 강제 매입하고 있으며, 거부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검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선인 기자와 변호사로 구성된 조사단이 장진을 방문하여 자초지종을 캐기 시작했다. 지역민들에게 안하무인이었던 군수와 서장은 태도가 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상부의 명령을 따를 뿐 토지 매입 이유는 자신들도 모른다며 잡아뗐다.
경성으로 돌아 온 기자들이 조선총독부에 알아본 결과 일제는 장진에 수력발전소를 세우려는 것으로 드러났다. 흥남에 대규모 질소비료공장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그곳을 가동시킬 전력공급원이 필요했다. 장진 주민들은 토지불매동맹까지 결성하여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협박과 회유 등 다양한 공작에 휘말려 토지를 내주고 말았고, 1930년대 후반에 장진강댐이 준공되면서 군청이 있던 읍내는 장진호에 수몰되고 말았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아직 ‘그래도 한반도에 발전소나 공장 등 근대 중공업 시설들이 생긴 건 일제강점기 덕분 아니냐’라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통찰이라곤 없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당시 일본이 질소비료공장을 세우려 한 진짜 이유는 공정상 전시에는 바로 화약제조공장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의 암운이 고조되던 유럽에서 히틀러의 독일은 당시 세계 최대의 질소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질소공장은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만 있으면 특별히 입지에 영향받지 않고 어디에든 지을 수가 있었기에, 일제는 독일을 참고삼아 대규모 질소비료공장을 지으려 했다. 그리고는 한반도 북부의 장진강, 부전강 등지에서 낙차가 아주 큰 수력발전의 가능성을 포착하고는 다짜고짜 토지 강탈을 시작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발전소를 짓는 과정은 일본의 기술력 시험 수단이 되기도 했다. 발전기나 변압기 등은 일본에서도 써보지 못한 대규모 용량이 필요했기에 안전성이 검증된 독일의 지멘스 제품 등을 수입하는 것이 타당했지만, 미쓰비시나 도시바 등 일본 회사들에게 발주되었다. 한반도 곳곳의 다른 전기 설비들도 대부분 일본 제품들이 쓰였다. 그 결과 발전기 제조 기술 등 일본의 전기공업은 그 시기에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일제가 한반도에 중공업 시설을 지은 것이 철저하게 이기적인 발로라는 사실은 관련 전문인력의 양성 상황을 살펴보면 더 뚜렷하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서 15년 가까이 지나도록 한반도에는 대학 자체가 없었다. 1922년에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교육협회에서 그를 초청하려고 시도했던 것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캠페인 차원의 기획이었다. 마침내 경성제국대학이 1924년에 개교했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재한일본인들의 인구는 늘어나는데 진학할 대학이 없다는 불만이 대두한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조선인은 정원의 1/3 정도였고, 그나마 이공학부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군수산업 인력 수요가 늘자 1943년에야 신설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무너져가던 1904년, 러일전쟁 중이던 일본은 토지수용에 반대하며 일본군 철도를 파괴한 조선인을 한성(서울)의 공덕리에서 처형한 뒤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기념엽서인 양 판매까지 하였다.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숨은 의도는 이 장면에서 이미 다 드러났던 것이나 다름없다. 자원 수탈과 노동 착취, 이를 실행하는 무자비한 압제.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실상에 그 어떤 긍정적인 면이 있겠는가. 우리 스스로 선택해서 실행할 수도 있었던 근대화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철저하게 짓밟히고 무시되었다.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