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남긴 연구노트. 미국 국립공문서기록관리국 제공
“실험노트는 연구자한테 일기장과 같습니다. 아니, 일기장 이상이죠. 그때그때의 실험 아이디어를 쓰기도 하고 연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잡다한 내용을 써두기도 하지요. 그래서 실험노트는 과학자의 ‘프라이버시’ 영역입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생명연)의 한 책임연구원은 실험노트가 연구자한테 어떤 의미인지 묻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최근 손숙미 한나라당 의원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비판적인 우희종 서울대 수의대 교수한테 정부 용역으로 수행한 ‘광우병 진단기술 개발’과 관련한 실험노트 등 자료 일체를 제출하라고 한 요구를 두고 한 말이다. 카이스트의 한 교수는 “연구진실성 조사위원회가 아니라 국회의원이 실험노트 제출을 요구한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실험노트가 뭐기에 연구자들은 왜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할까?
■ ‘정치권의 실험노트 요구’ 첫 사례 손숙미 의원은 지난 19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을 통해 2005~2006년 우 교수가 한 광우병 진단기술 연구의 보고서와 실험노트 등 자료를 모두 내라고 요구했다. 손 의원은 23일에도 “우 교수의 실험노트만 국가 1급 비밀이냐” “국고를 들여 수행한 연구 용역이 부실덩어리라면 이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시정해야 하는 게 국회의원의 구실”이라며 실험노트 공개 압박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우 교수는 “실험노트를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다만 정당한 사유를 제시하면 검토해 공개할 건 공개하겠지만 지금처럼 절차나 근거도 없이 요구하는 데엔 응할 수 없다”고 맞섰다. 우 교수는 실험노트는 연구실과 대학기관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교수협의회 차원에서 논의한 뒤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일은 정치권이 실험노트 제출을 직접 요구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금세 눈길을 끌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과학기술 연구자들의 온라인 게시판인 ‘브릭’과 ‘사이엔지’엔 “비판적 지식인을 차단하려는 본보기” “정말 믿어지지 않는 행동”이라는 둥 대체로 비판적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 “실험노트는 일기장이자 자존심” 몇몇 이름난 국내 과학자들한테 실험노트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 들어봤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책임연구원은 “실험노트는 일기장이자 실험실 생활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엄청난 내용이 담긴 건 아닐 수도 있지만 특허와 관련한 내용이 담길 수도 있고, 남이 보면 경쟁 분야의 실험 아이디어가 새 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실험노트 공개엔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카이스트의 한 교수는 “실험노트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쓰는 사적 기록이자 일기장이며 그래서 나의 자존심”이라며 “그걸 정치인이 엄정한 사유 없이 공개하라는 건 자존심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양대의 한 교수는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 데 꼭 필요하다면 공개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면서도 “실험노트 제출을 요구받는 것만으로도 연구자는 연구 능력을 의심받아 자존심이 크게 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실험노트 제출 요구는 과학계에서 특별한 절차를 밟아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대표적 사례로, 2005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과 올해 김태국 카이스트 교수의 ‘매직기술’ 논문 조작 사건 때 대학 조사위원회가 연구 부정 의혹의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며 실험노트 제출을 요구한 바 있다. 과학기술연구원의 연구자는 “실험노트는 연구진실성 조사위원회나 특허 분쟁을 다루는 법정과 검찰처럼 정해진 곳에서 절차를 밟아 공개되는 게 관례”라며 “정치인의 요구는 웃기는 난센스”라고 말했다.
■ 정부도 “실험노트 비공개” 원칙 정부도 실험노트 공개는 제한적으로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정부는 ‘아이디어 선취권’ 주장의 근거로 삼아 특허 분쟁에 대비하고 실험실의 연구윤리 의식을 높이겠다는 뜻으로 지난해 12월 ‘국가 연구개발사업 연구노트 관리 지침’을 마련해 옛 과학기술부 훈령으로 발표한 바 있다. 올해부터 시행된 훈령을 보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연구노트(실험노트)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며 △공개가 필요할 땐 연구관리 심의회를 거쳐 결정하도록 했다. 국가 연구개발 사업이라 해도 실험노트 공개는 연구 용역을 준 정부가 직접 결정하지 못하며 연구기관이 자율 심의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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