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리노이대학 안 베크먼연구소에는 공학, 생물학, 신경과학 등 다양한 연구실이 한곳에 모여 있다. 생물학 연구실에서 열띤 얘기를 나누는 교수와 대학원생들. 베크먼연구소 제공
[사이언스 온] 살며 연구하며
외국에서 유학하다 보면 언어장벽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특히나 여러 사람이 팀워크를 이뤄 연구 일정을 착착 진행해야 하는 실험실 연구에선 더욱 그렇다. 여기에 더해 내게 특별한 문제가 또 있었다. 우리 실험실을 이끄는 지도교수, 이른바 ‘캡틴’은 루마니아 출신이다. 그래서 영어가 외국어인 나와 캡틴의 만남은 실험실 일상에서 여러 에피소드를 낳았다. 지금이야 이곳에 온 지 1년이 넘었으니 어느 정도 다문화 생활에 적응했지만, 초기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신경과학 학회에 발표할 연구성과 초록을 마감할 때였다. 캡틴이 자료를 전하며 “어낼리시스(analysis)를 해봐, 오후 5시까지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고 했다. 분석이라…. 나는 분석에 들어갈 뇌 영상 데이터를 일일이 정리하며 진땀을 뺐고, 해석에 낑낑대느라 바빠 도무지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밤 9시를 넘길 무렵 캡틴이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한참 혼이 난 뒤에야, 캡틴은 자료를 정리해달라는 뜻이었고 나는 해석을 더하는 일로 알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리 물어봤으면 고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결국 주말에도 일찍 출근해야 했다. 당시 켄터키주에서 이메일을 통해 실험실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돕던 학부 연구생한테 자료 손질을 부탁하는 긴 편지를 써서 도움을 요청했다. 캡틴도 편지를 함께 받을 수 있게 설정해 이메일을 보냈다. 얼마 뒤 전화벨이 울리고 다시 캡틴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네 나라말에는 생큐, 플리즈, 익스큐즈 미도 없나! 한국어로 말해봐!” 어리둥절한 채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분명 있구먼. 그런데 왜 그런 표현을 안 쓰나?”
캡틴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학부생은 지금 멀리 켄터키에 있잖나. 게다가 오늘은 주말이고. 상대방의 상황을 잘 모른 채 부탁할 땐 가능한 한 공손해야 한다고. 생큐, 플리즈, 익스큐즈 미! 알겠나?”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보낸 편지를 다시 보니 거기에는 감사의 표현도, 부탁의 표현도 없었다. 뜨끔했다. 캡틴의 호통은 내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부분을 알려주었다. 외국어로 소통할 때에는, 특히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대한테 최대의 언어 예절을 갖춰야 한다는 걸.
모국어 아닌 언어를 쓰며 연구해야 하는 이가 지닌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는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다. 그렇지만 노력한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낳는 오해와 문화적 장벽을 넘어, 날마다 얼굴 맞대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손발을 맞춰 간다. 때때로 삐거덕거려 얼굴 붉힐 일이 있더라도 울상만 짓고 있을 순 없다. 장벽이 차츰 낮아져 손발이 착착 맞아떨어질 그날까지 애쓸 뿐이다.
김서경 미국 일리노이대학(어바나-섐페인) 인지신경과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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