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형주-정수근의 기억실험실
⑥기억저장 장소
‘기억은 뇌의 물리화학적 흔적’
1904년 ‘엔그램 가설’ 제시된 이후
뇌과학 중요한 도전 중 하나는
기억 저장 장소를 찾아내는 것
해마에는 기억 중 일부가 저장
세포간 연결 ‘시냅스’ 중요 역할
광유전학은 특정 신경세포 발견
최근 유전물질도 후보로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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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세포(뉴런)의 존재가 처음 눈으로 확인된 19세기 말 이후, 기억의 흔적을 간직한 기억 저장소 ‘엔그램’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돼 왔다. 왼쪽은 19세기 말 세포염색 기법을 써서 신경세포들을 식별해낸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그림(1899), 오른쪽은 최신 기법을 이용해 현미경으로 관찰한 인간 신경세포 영상(2000).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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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고려시대이고 당신은 각고의 노력 끝에 무과시(무인 등용을 위한 과거시험)에 합격한 무인이라고 상상해보자.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자식에게도 무예를 가르칠 때가 되었다. “네 몸이 기억할 때까지 꾸준히 수련해야 하느니라.” 당돌한 당신의 아들이 묻는다. “그런데 아버님이 가르쳐주신 그 검법은 제 몸 어디에 기억되는 것이옵니까? 수련을 그곳에 집중하면 더 빨리 익힐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대는 잠시 당황하겠지만, 이내 자상한 어조로 “네 몸 전체로 익히는 것이니라”고 알 듯 모를 듯 한 대답을 했으리라.
실제로 중세 서양 철학자들도 인간의 경험과 지식, 기술은 팔, 다리, 심장, 콩팥 등 신체 기관에 나뉘어 존재할 것이라 상상했다고 한다. 이번 글에서는 뇌부터 신경세포(뉴런), 시냅스(신경세포 간 연결), 분자까지 점차 미세한 단위에서 기억의 실체를 찾으려는 현대 신경과학의 시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레코드판 홈과 음악처럼?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이는 인류가 오랫동안 품어온 물음이다. 현대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이제는 머리로 습득한 정보뿐 아니라 몸이 경험한 것도 두뇌에 기억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기억이 뇌에서 어떤 형태로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 상태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 저장의 원리는 레코드판에 음악이 기록되는 것과 비슷한 듯하다. 기억은 습득된 뒤에 오랫동안 남아 있고 필요할 때 이를 다시 꺼내어 볼 수 있으므로, 마치 뇌에 새겨진 흔적과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코드판을 우리의 뇌라 하고 음악이 우리가 학습한 정보라고 한다면, 기억은 뇌 속 어딘가에서 레코드판 위의 미세한 홈과 같은 흔적으로 남겨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흔적들은 기억의 수명만큼 유지되고, 때로는 변형되거나 희미해질 수 있다. 축음기 바늘 구실을 하는 무엇인가는 필요할 때 미세한 홈들을 읽어내어 기억이라는 음악을 재생할 것이다.
이를 멋지게 한 단어로 표현한 사람이 독일의 동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리하르트 제몬(1859~1918)이다. 그는 1904년 <기억술>이라는 책에서 기억을 표상하는 뇌의 물리화학적 흔적, 즉 레코드판의 홈과 같은 것을 ‘엔그램’(engram)이라고 처음 언급했다. 이 개념을 바탕으로 후대 과학자들은 엔그램의 실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초기의 실마리는 기억 장애를 겪는 환자들을 유심히 관찰한 신경외과 의사들의 발견들에서 나왔다. 지난 글
(6월1일치 ‘완벽한 기억을 가지면 인생이 더 편해질까’)에서도 언급됐던 헨리 몰레이슨, 즉 에이치엠(HM)이라는 간질 환자를 대상으로 한 1950년대 임상연구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들이다. 당시 에이치엠은 간질 치료를 받기 위해 해마를 포함한 내측 측두엽을 제거하는 외과수술을 받았다. 이후 간질 발작은 사라졌지만, 그는 해마의 상실로 인해 방금 전에 겪은 경험을 수십초 이상 기억할 수 없는 부작용을 겪게 되었다. 이런 사례는 뇌의 여러 부위 중 해마가 새로운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핵심 부위이며 기억의 엔그램이 존재하는 장소라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에이치엠의 연구 사례는, 기억이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뇌 부위에서 처리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해마를 제거했지만 그의 지능, 감각, 운동 능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며, 특히 일부 기억 능력은 정상이었다. 예를 들어 그에게 특정 모양을 따라 그림을 그리도록 과제를 주면, 처음에는 정확하게 따라 그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확도가 향상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는 해마가 없어도 운동과 절차에 대한 기억이 정상적으로 저장될 수 있음을 의미하며, 해마는 ‘일부’의 기억들이 저장되는 장소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후에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이 그 종류에 따라 해마 이외에도 피질, 기저핵, 소뇌, 편도체 같은 다른 뇌 부위에 저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토록 작은 뇌에 그 많은 정보가
에이치엠의 사례처럼 특정 뇌 부위의 제거나 기능 저하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들을 관찰함으로써, 특정 종류의 기억이 뇌 어느 부위에 저장되는지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뇌 부위 자체가 기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뇌는 세포들로 가득 찬 조직 덩어리이고, 이 세포들에 의해 뇌 기능이 조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방대한 정보들은 세포 덩어리에 어떻게 나뉘어 저장될까? 인간의 뇌는 약 47억권의 책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실제 뇌의 크기는 가로세로 15㎝가량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정보가 이토록 작은 조직 안에 어떻게 섞이지 않고 분리되어 저장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매우 특별한 기억 저장 형태가 고안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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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경과학과 기억 연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왼쪽)과 도널드 헤브. 위키미디어 코먼스, 예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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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은 학습 자극에 의해 ‘발화’(fire)라 불리는 전기적 신호를 발생시키며, 이 발화 신호는 신경전달물질이라 불리는 화학물질을 통해 다른 신경세포로 전달된다. 190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스페인 신경과학자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1852~1934)은 특정 세포염색 기법을 이용해 뇌에 여러 종류의 신경세포들이 존재하며, 신경세포들이 ‘시냅스’(synapse)라는 연접 부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라몬 이 카할의 발견을 바탕으로 심리학자 도널드 헤브(1904~1985)는 1949년 <행동의 구성>이라는 책에서 기억이란 ‘세포들 간의 연결성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헤브의 법칙, 즉 ‘함께 발화한다면 그 신경세포들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fire together, wire together)라는 이론이다.
학습을 통해 정보가 뇌로 유입되면, 정보량에 비례해 신경세포의 활성이 증가한다고 예상할 수 있다. 기억은 정보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이므로, 신경세포 활성은 증가한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경세포들은 시냅스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정보 유입에 의해 신경세포 활성이 증가한 상태로 남아 있으려면 시냅스를 통한 신경세포 간 연결성이 증가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즉, 학습 이후의 신경세포 간 연결성은 학습 전보다 정보량에 비례해 증가해 있을 것이다. 이렇듯 헤브의 법칙은 시냅스를 통한 신경세포 간 연결성의 증가가 곧 기억의 생물학적 저장 형태일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제공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뇌에서는 신경세포 간 연결성이 오랫동안 유지될까? 1966년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박사과정 학생이던 테리에 뢰모(Terje Lømo)는 토끼의 해마에 특정 자극을 주면 해마 신경세포들의 시냅스 활성이 증가 상태로 오래 유지되는 현상을 관찰했다. 뒤이어 해마의 기억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캐나다 맥길대학의 팀 블리스 박사가 연구에 합류하면서, 이들은 해마에서 시냅스 활성이 특정 패턴의 전기 자극에 의해 몇 시간 이상 유지되는 ‘장기 강화’ 현상을 1973년 과학계에 최초로 보고했다. 이후 현재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장기 강화를 조절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연구하면서, 이를 통해 기억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가짜 기억도 생성 가능
기억의 정체를 찾는 연구는 ‘광유전학’의 등장과 함께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칼 다이서로스 박사 연구진이 개발한 ‘광유전학’은 빛과 유전자를 이용해 특정 세포를 조절하는 기술이다. 2012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도네가와 스스무 박사 등은 광유전학 기법을 이용해 기억 정보가 특정 신경세포 무리에 저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이 세포 무리들을 가리켜 ‘엔그램 세포’라고 명명했다. 이들은 광유전학 기법으로 동물의 특정 기억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나아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동물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성공하여 주목을 끌었다.
결국 기억 저장의 주역은 특정 신경세포들인 것일까? 그러나 ‘엔그램은 신경세포 간의 연결성(시냅스)에 존재한다’는 도널드 헤브의 가설도 과학계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 도쿄대학의 가사이 하루오 박사 연구팀은 광유전학 기법을 통해 특정 시냅스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썼다. 2015년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운동 기억이 형성된 생쥐의 뇌에서 학습에 의해 활성을 띤 특정 시냅스들만을 골라 제거했을 때 이미 저장되었던 운동 기억이 사라지는 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는 세포보다 더 작은 크기인 시냅스들이 엔그램의 단위가 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최근 서울대 강봉균 교수(생명과학부) 연구팀도 기억이 저장될 때 엔그램 세포뿐 아니라 그들을 서로 연결하는 시냅스 구조들도 증가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기억 정보가 엔그램 세포 자체가 아니라 그 세포들 사이의 시냅스에 저장될 수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했다.
물론 세포나 시냅스보다 훨씬 더 작은 실체에 엔그램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기억의 흔적이 유전물질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의 데이비드 글랜즈먼 박사 연구팀은 바다 달팽이의 일종인 ‘군소’에게 반사 작용을 학습시킨 뒤 뇌에서 유전물질인 아르엔에이(RNA)를 추출했다. 이 아르엔에이를 학습 경험이 없는 다른 군소의 신경세포에 주입했더니, 그 군소들에서 학습하지도 않은 반사 기억을 이미 보유한 것과 같은 행동이 나타났다. 장기 기억이 형성되려면 유전자 및 단백질의 발현 변화 과정이 필수적이므로, 기억의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물질이 존재한다면 이를 인위적으로 주입함으로써 가짜 기억도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의 정체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거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미진하며, 앞으로의 여정은 이미 지나온 것보다 멀고 험난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뇌의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로건 ‘기억의 흔적’, 즉 엔그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인간 자신이 학습하고 기억한 지식을 가지고서 다시 자기 기억의 실체를 파헤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광유전학이 엔그램 세포의 발견을 이끌었던 것처럼 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혁신적 기술이 개발된다면 언젠가는 이런 모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기억 저장소의 실체에 한걸음씩 다가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원리를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한편, 인간 정신이 어떻게 망가지고 고쳐질 수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책임연구원(신경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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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정수근의 기억 실험실: 기억은 뇌 어디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기억은 어떻게 저장되고 쇠락하고 변형될까? 인류가 기억에 관해 호기심을 가진 것은 오래됐지만, 기억의 실체가 과학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한 건 최근 뇌과학이 발전하면서부터다. 정부 산하 뇌 분야 전문 연구기관인 한국뇌연구원의 박형주·정수근 선임연구원이 뇌과학이 밝혀낸 기억의 비밀을 번갈아 들려준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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