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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아카이브

[장윤환 칼럼] 만들어가는 역사

등록 2018-05-16 15:22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7월 27일 한겨레신문 4면 ‘편집국에서’

장윤환 기획취재본부장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예외 없이 옛 로마제국의 폐허인 '로마광장'에 들른다. 몇 차례의 지진을 용케도 견뎌 낸 돌기둥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로마광장에는 유명한 원로원의 돌층계가 복원되어 있다.

“시저가 암살당한 곳이 바로 저깁니다!”

안내자의 설명을 귓전으로 들으며 한국인 관광객은 자신도 모르게 '궁정동'을 떠올린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오전 황제로 추대받게 된 시저는 “꿈자리가 사나우니 조심하라”는 부인의 충고를 무릅쓰고 '황제 수락 연설'을 하기 위해 등원하다가 독재자를 경계하는 브루투스 등 로마 귀족들에게 암살당한다.

입심 좋은 셰익스피어는 그 극적인 장면을 이렇게 재현하고 있다.

“로마의 귀족, 나 브루투스는 그대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조국 로마를 더 사랑하기에 그대를 찌르노라!”

“아니, 브루투스 그대마저도? 그렇다면 시저는 죽어야지.”

기원후 1979년 10월 26일 저녁―종신 대통령의 길을 터놓았지만 “꿈자리가 사납다”고 충고해줄 부인도 없던 박정희 장군은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다 놓고 양주 시바스 리걸을 마시다가 김재규에게 사살당한다.

보도에 따라 재현해 보는 그 장면은 이렇다.

“차지철, 이 버러지 같은 놈!”

“아니, 왜들 이래!”

2천 년의 시차를 두고 로마와 서울에서 벌어진 두 암살사건은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도 많고 틀리는 점도 많다. 우선 비슷한 점은 피살자가 둘 다 장군 출신에다 독재혐의가 있거나 독재자였다는 점, 그리고 암살자는 둘 다 피살자의 측근이라는 점이다. 굳이 다른 점을 들자면 한쪽은 칼을 쓰고 한쪽은 총을 썼다는 정도라고나 할까.

암살 뒤의 사태 진전 또한 비슷하다. 시저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 가운데 사당까지 세워지게 되었고, 박 대통령은 1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신본당'과 '유신잔당'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추앙받고 있다.

암살자 브루투스는 시저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장군에게 쫓겨 끝내 자살하고 말았으며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정신적 상속자격인 전두환 장군에게 사로 잡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장군이나 전두환 장군이 암살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한 것도 비슷한데, 두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점이 있다. 옥타비아누스 장군은 극적인 연설로 로마 시민들을 감동시켜 정권을 잡았지만 전두환 장군의 경우는 복잡한 절차 없이 적나라하게 총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 장군의 집권 결과는 무척 다르게 나타난다. 옥타비아누스는 형제들이 없었는지 혹은 집안 단속을 잘했는지는 몰라도 시저 호칭을 쓰는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로 90살까지 잘 먹고 잘살았지만, 전두환 장군의 경우는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정권을 내놓자마자 국가원로자문회의다, 새마을 사건이다, 전 씨 형제 스캔들이다, 이 씨 형제 스캔들이다, 노드롭이다, 일해재단이다, 새세대육영회다, 청남대다, 연희궁이다, 5공 비리다, 광주학살이다… 온갖 시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시저 암살사건이 이미 흘러간 역사인 데 반하여 박 대통령 암살사건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아직도 민중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이며, 스스로 역사의 주체임을 각성한 민중들이 그 완강한 억압의 고리를 끊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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