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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아카이브

중국집 철가방과 한겨레신문의 공통점은

등록 2018-05-29 17:23수정 2018-05-29 17:30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한글 가로쓰기와 가로짜기 혁신

2009년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우리를 닮은 디자인, Korea Design Heritage 2008’이란 이름으로 52개 디자인 목록을 발표했다. 이 목록에는 바나나맛 우유(맨 왼쪽), 모나미 153 볼펜(가운데), 중국집 철가방 등과 함께 한겨레신문 창간호(맨 오른쪽)가 이름을 올렸다.                                                                                         한겨레 자료
2009년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우리를 닮은 디자인, Korea Design Heritage 2008’이란 이름으로 52개 디자인 목록을 발표했다. 이 목록에는 바나나맛 우유(맨 왼쪽), 모나미 153 볼펜(가운데), 중국집 철가방 등과 함께 한겨레신문 창간호(맨 오른쪽)가 이름을 올렸다. 한겨레 자료

‘우리를 닮은 디자인.’

2009년 5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친 사물과 풍경 등 52개 디자인을 선정했다. 중국집 철가방, 이태리 타월, 모나미 153 볼펜 등과 함께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이름을 올렸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시민들의 눈길이 세로축에서 가로축으로 바뀌는 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취지다. 한겨레는 전국 종합 일간지 가운데 처음으로 신문 1면부터 맨 마지막 면까지 모두 가로쓰기로 편집했다. 한겨레 창간 10년 뒤인 1999년, 조선일보를 마지막으로 한국의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 대열에 합류했다.

사실 한겨레가 창간되던 1980년대 후반은, 이미 학교에서 가로쓰기 교과서로 수업한 세대가 나이 쉰을 넘기기 시작한 때다. 광복 이후 1948년, 정부는 모든 초·중·고교와 대학의 교과서 및 공문서를 한글 가로쓰기로 한다는 내용의 한글전용법을 통과시켰다. 세로쓰기는 한글에 맞지 않는 일제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광복 후 교과서는 가로쓰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기성신문은 식자층에게나 익숙한 국한문 혼용 세로쓰기를 고수했다. 1982년 한국언론연구원이 ‘신문활자의 가독성 연구’를 통해 세로쓰기보다 가로쓰기가 독자의 가독성을 높인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지만, 소용없었다. 기성신문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세로쓰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독자 다수를 차지해, 가로쓰기로 전환할 경우 독자가 이탈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일제 이전에 발행된 한국 최초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가로쓰기의 흔적이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 일제 이후 한국 기성언론에 깊게 뿌리 내린 세로쓰기 편집 유산이 청산되지 못한 상태가 이어진 셈이다.

30년 전 한겨레가 창간될 때, 다른 전국종합일간지는 모두 세로쓰기를 고수하고 있었다. 왼쪽은 1988년 6월 2일 동아일보 1면의 모습이며, 오른쪽은 같은 해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의 모습.                                                                  한겨레 자료
30년 전 한겨레가 창간될 때, 다른 전국종합일간지는 모두 세로쓰기를 고수하고 있었다. 왼쪽은 1988년 6월 2일 동아일보 1면의 모습이며, 오른쪽은 같은 해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의 모습. 한겨레 자료

한겨레는 이 같이 광복 이후 한국 언론계에 남은 해묵은 과제를 해결했다. 창간 계획 때부터 한글 가로쓰기 방침을 확정했다. 1987년 10월 확정한 ‘새 신문 창간 계획서’ 첫 면에는 “한글 가로쓰기와 쉬운 표현으로 편집자의 특권의식 및 독단주의를 배격한다”고 쓰였다. 땀 흘리며 일하는 대중이 쉽게 볼 수 있는 신문 형태를 지향했기 때문에, 다수 시민의 독서습관과 일치하는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선택했던 것이다. 서독언론인 타게스차이퉁은 1988년 1월 20일 보도에서 한겨레 창간 준비 과정을 이렇게 소개한다.

“한겨레의 창간정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이 신문이 한국 신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을 전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기사는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한국에 도입한 세로쓰기가 아니라 가로쓰기로 쓰일 것이다.”

한겨레 편집부는 한국 신문의 ‘가로짜기’ 혁신을 이끈 개척자였다. 가로쓰기가 단지 글줄을 가로로 쓰는 것을 일컫는다면, 가로짜기는 가로쓰기와 함께 신문 기사를 가로로 배치하는 가로편집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한겨레 창간에 앞서 1947년 호남신문이 가로짜기를 처음 시도했으나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세로짜기로 돌아갔다. 1970년대 초 서울신문이, 1980년대 중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지면 일부를 가로짜기로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후퇴했다. 익숙한 편집 관행인 세로짜기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겨레 안팎의 편집기자 심층 인터뷰를 토대로 한 권귀순의 석사논문 ‘한겨레 편집 변천에 관한 연구-가로짜기 전형의 정립과정을 중심으로’를 살펴보면, 한겨레 편집사는 길이 없는 곳에 ‘편집의 포장도로’를 낸 역사와 같다. 한겨레도 한글에 맞는 가로짜기 원칙을 찾기까지 4년여의 시간이 들었다.

편집기자들의 의식이 가로짜기로 옮아가도, 지면에 가로편집을 투영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로짜기를 하면서 맨 처음 부딪힌 기사 제목 문제도 그랬다. “세로제목을 꼭 써야 한다는 선배들이 있었다. 세로제목이 있어야 지면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던 때다. 나는 세로제목을 쓰지 말자고 끈질기게 그 선배들을 괴롭혔다.” 김경애의 회고다. 기자들의 일상적인 논쟁 속에서 가로짜기에 스며든 세로짜기의 흔적이 하나둘 걷어졌다. 창간 직후 두 달여 논란 끝에 한겨레 지면에서 세로제목이 추방되었다.

’가로쓰기’에 맞는 ’가로짜기’ 편집 혁신

새로운 틀은 다른 혁신을 견인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세로제목을 걷어내고 가로제목을 사용하자, 기사 제목달기의 문법에도 변화를 줄 수 있었다. 공간이 부족해서 압축적인 한자말 위주로 제목을 달던 관행 대신, 교열부에서 발굴한 순한글 단어를 제목에 사용할 수 있었다. “세로제목은 7~9개 글자 정도만 쓸 수 있어서 한문 투로 제목을 붙이기 일쑤였다. 가로제목은 순한글을 살려 쓰겠다는 한겨레 창간정신에 부합하는 것은 물론, 하나의 행에서 제목이 완결되는 구조로 독자에게 더 친절한 제목을 뽑을 수 있는 편집방식이었다.” 임종업의 회고다.

한겨레 초창기 지면은 세로편집의 관행에 따라 기사를 다각형으로 흐르게 배치했다(왼쪽). 한겨레 편집부는 수년에 걸쳐 기사를 이리저리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의 직사각형 블록으로 구획한 가로짜기 편집을 개척했다. 이런 편집방식은 1994년 창간기념호(오른쪽)부터 전면 도입되었으며, 이후 한국의 모든 신문에 정착되었다.                         한겨레 자료
한겨레 초창기 지면은 세로편집의 관행에 따라 기사를 다각형으로 흐르게 배치했다(왼쪽). 한겨레 편집부는 수년에 걸쳐 기사를 이리저리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의 직사각형 블록으로 구획한 가로짜기 편집을 개척했다. 이런 편집방식은 1994년 창간기념호(오른쪽)부터 전면 도입되었으며, 이후 한국의 모든 신문에 정착되었다. 한겨레 자료

또한 창간 초기 편집은 기사를 톱니바퀴 맞물리듯 흘러내리게 배치하는 세로짜기식 ‘흘림편집’이 녹아 있다. 국내 신문 중 가장 앞서간 탓에 참고할 다른 신문은 없었다. 한겨레 창간 편집기자들이 실험정신을 발휘했다. 해외공보관을 찾아가서 외국신문을 훑기도 하고, 시각디자인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했다. 월스트리트저널, 유에스에이 투데이 등의 편집매뉴얼을 우편으로 공수 받아 참고했다. 1992년에야 세로짜기식 흘림편집 대신 네모 단위로 기사를 배치하는 ‘블록편집’을 찾았다. 지면에 먼저 구현된 블록편집은, 용어로서는 1993년 ‘한겨레 편집매뉴얼’에서 처음 발견된다.

하지만 다른 한겨레 사람들이나 독자에게 블록편집은 낯설었다. “이건 편집도 아니다”라는 반응이 터져 나왔지만, 선구적 편집기자들은 이에 꺾이지 않고 꾸준히 새 편집을 개척했다. 독자 가독성 조사를 벌이는가 하면, 구성원들의 눈에 익게 만들려고 매일매일 시험판을 짜서 편집회의실 벽에 붙여놓고 찬반 표시를 하면서 의견을 모았다. 결국 신문 1면부터 끝까지 블록편집을 전면 도입하기까지 2년이 더 걸려, 1994년 5월 15일 창간기념호부터 가로짜기가 전면 도입되었다. 이 방식은 현재 한국의 모든 신문이 따르고 있는 편집 방식이다.

한겨레는 2005년 국내 언론 가운데 최초로 탈네모꼴 ’한겨레 결체’를 온라인에 무료 배포했다.
한겨레는 2005년 국내 언론 가운데 최초로 탈네모꼴 ’한겨레 결체’를 온라인에 무료 배포했다.

가로짜기 신문에 최적화한 한글 서체 개발의 꿈은 ‘제2창간’을 선언한 2005년에야 실현되었다. 가로짜기용 서체와 세로짜기용 서체는 성질이 다르다. 한겨레는 창간 때 가로짜기 편집을 선구적으로 도입하며 서체도 이에 맞춰 변화를 주었으나, 편집부에서는 아예 새로운 서체를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다만 개발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2005년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한겨레서채개선TF팀이 외부디자인업체인 글씨미디어, 외부제작업체인 태시스템과 함께 새 글꼴 개발에 매진했다. 그해 5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탈네모꼴 서체인 ‘한겨레 결체’, ‘한겨레 돌체’를 선보였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의 조형 원리에 따르면 낱 자모를 본디 크기대로 개성을 살려 써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 한글 서체는 한자를 흉내 내 가상의 네모틀에 맞춰 억지로 늘이거나 줄여 써야 했다. 한겨레는 창간정신의 계승과 ‘신뢰할 수 있는 고급 정론지’라는 제 2창간의 슬로건에 걸맞은 형식으로서 탈네모꼴 서체를 개발하고, 제호와 신문 기사 제목, 본문에 전격 도입했다. 한글의 특성에 맞고 기능적으로도 우수하다고 알려진 세벌식 한글꼴을 지향하되, 기존 독자의 취향을 고려한 합의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한국 언론 최초로 서체를 무료로 배포했다.

탈네모꼴 서체 개발과 ’미완’의 꿈

새 글꼴 도입에 대한 한겨레 내부의 우려가 적지는 않았다. 특히 본문 글자보다 획이 두껍고 투박해 보였던 제목글자에 대한 편집기자들의 우려감이 컸다. 탈네모꼴의 서체철학에 동조하는 기자들도 “조형적 완성도를 더 높인 뒤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체 완성도를 높이고 다듬는 일에도 투자가 필요했다. 탈네모꼴의 진보적 지향성이 한겨레의 정체성과 맞닿아있다는 논리로 지면에 우선 도입했지만, 사후 관리가 부족했다. 다시 후순위로 밀려난 탓이다. 디지털 모바일 환경에 걸맞은 한글 서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점도 새롭게 부상했다. 결국 2012년 5월 15일 창간 24돌 기념호부터 제목에서는 탈네모꼴 서체에 변화를 줘야했다. 탈네모꼴 서체의 완성은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한겨레 교열부 기자들이 하루에 보는 글자 수는 최소 3만 6000여자게 달한다. 2016년 박정숙 기자가 교열을 보는 모습.                                                     김성광 기자
한겨레 교열부 기자들이 하루에 보는 글자 수는 최소 3만 6000여자게 달한다. 2016년 박정숙 기자가 교열을 보는 모습. 김성광 기자

초창기 한겨레는 한글 가로쓰기 신문에 걸맞은 순한글 단어의 개발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한겨레가 일본말, 한자어, 외래어 등을 우리말로 다듬어 퍼뜨린 말이 많다. ‘모’를 ‘아무개’로, ‘장애가 되다’를 ‘거치적거리다’ 등으로 바꾸어 썼다. 새내기, 동아리, 짬짜미, 걸림돌, 디딤돌 등 기성신문에 쓰이지 않던 우리말들을 발굴해 신문의 언어로 확산시켰다. 한글학회 연구원으로 일하다 1988년 한겨레 창간에 뛰어든 최인호, 김인숙 등 교열부 기자들이 앞장섰다.

우리 말을 발굴해 신문의 언어로

한겨레만의 세부 교열 기준을 마련하는 데도 꼬박 10년이 걸렸다. 언론사들은 모두 기사를 쓸 때 두루 적용하는 원칙으로서 ‘기본표기’를 갖고 있다. 한겨레도 창간 때 “한글 가로쓰기 정신을 살려 우리 말글로만 쓴다. 우리말에 적합한 낱말이 없거나 관용상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예외로 하나, 이는 될수록 줄인다”는 등의 총칙과 호칭·날짜·문장부호 등 분야별로 나눠 쓴 기본표기 약속을 만들었다. 세부적인 기사 작성 원칙을 담은 ‘완전원고수첩’의 얼개는 1995년에 만들어졌고, 그 뒤 수정과 보완을 거쳐 2000년 6월에 완성되었다. 2004년, 한겨레는 한국사회 전체의 말글살이에 기여하려는 목적으로 한겨레말글연구소를 차렸다. 연구소는 공공언어, 특히 언론언어를 대상으로 삼아 우리말 쓰기의 실태를 연구하고 있다.

※ 한겨레가 창간 30돌을 맞아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를 열었습니다. 이 글은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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