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기자.
싸우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벼랑끝 전술’은 북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미국은 지난달 15일 한국 정부에 반환 예정 기지 15곳을 7월15일자로 한국에 넘기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반환 기지 환경오염 치유에 대한 양국 간 ‘절차 합의서’는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안하무인식 미국의 태도도 문제지만, 한국 정부의 태도는 더욱 한심하다. 환경을 오염시켜 놓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는 미국의 태도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자동차 사고를 내고 뺑소니치는 파렴치범”(녹색연합 성명서)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미국을 감싸안기에 급급했다. 지난 14일 한-미 협상 뒤 정부가 발표한 “8개항으로 치유하기로 한 15개 기지를 반환받는다”는 내용은 그렇게 나왔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8개항 치유’를 미리 합의된 것처럼 포장해 미국의 행위를 정당화해 준 것이다.
더구나 국방부는 미국한테 관리권을 넘겨받은 기지 수 발표마저 축소했다. 의정부의 카일, 파주의 게리오웬, 서울의 그레이 등이 그곳이다. 이 기지들은 그나마 미국이 주장하는 8개항의 치유조처마저 끝나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이들 기지의 열쇠꾸러미부터 덜컥 넘겨받았다. 미군이 경비용역을 철수하자, 국방부는 친절하게도 한국군 병사들을 배치해 경비·관리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뒤 국방부가 내놓은 해명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미군은 경비용역업체에 맡겨 기지를 관리하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우리는 병사들을 보내면 되기 때문에 큰 부담이 안 돼 지원하는 것이다.” 미군의 경비 절감을 위해서는 우리 병사들을 동원해도 된다는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미군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친절한 국방부’ 때문에 환경오염 처리를 둘러싼 한-미 협상에서 우리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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