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전재앙 25년 현장을 가다] 중.피해국가 원전개발 ‘역설’
26일 새벽 1시24분, ‘재앙의 시각’이 되자 크레바로치카 라이사(64)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주름진 손으로 성모 마리아 그림을 든 채 한참을 울었다.
1986년 4월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나던 그날도 남편은 트럭을 몰고 체르노빌로 향했다. 그는 과일과 생필품을 시골 마을에 공급하는 일을 했다. 라이사는 “남편은 원전 사고 뒤에도 체르노빌에서 일했다”며 “4년 전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 암이었고, 넉달 만에 허망하게 갔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와 체르노빌,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슬라부티치 세 곳에서 이날 새벽 동시에 추모미사가 열렸다. 키예프 미사에 참석한 라이사는 매달 체르노빌의 빈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한다. 그는 “남편의 죽음은 체르노빌 때문”이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국제사회는 키예프에 모여 25년 전 체르노빌 재앙이 던진 메시지를 되새겼다.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었던 ‘원자력 재검토’ 바람은 기존의 관성대로 급격히 회귀하는 모습이다. 19~20일 50개국이 모여 붕괴 우려가 제기된 체르노빌 원전 4호기의 석관 보강공사 비용을 모금했지만 목표액의 74%인 5억5000만유로(약 8680억원)를 약속받는 데 그쳤다. 21~23일 열린 국제회의의 주제도 ‘핵의 안전한 이용’으로, 안전과 규제 방안이 논의됐을 뿐이다.
체르노빌 사고의 최대 피해국인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도 정부가 원전 추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환경단체들의 반대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벨라루스의 환경단체 ‘에코돔’(에코홈)의 이리나 수히 고문은 “아직 피해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원전을 짓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정부가 원전 반대운동을 반정부 활동으로 여겨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사고를 수습한 옛소련의 핵공학자 게오르기 레핀(80) 박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국제사회가 원자력 르네상스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원전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세계는 공포감에 떤다. 체르노빌 사고의 가장 큰 피해는 바람을 타고 번진 방사능이 던진 사회·심리적 공포였다. 체르노빌 현지 취재에 동행한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남편 죽음의 원인을 체르노빌로 믿는 라이사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가 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류는 체르노빌이 던진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키예프·민스크/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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