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호 태풍 마이삭이 부산에 상륙한 지난 9월3일 오전 부산 기장군 고리 원전 3호기와 4호기의 모습. 이날 태풍으로 고리 원전 3·4호기를 비롯해 신고리 1·2호기 등 원전 4기가 순차적으로 가동을 멈췄다. 연합뉴스
정부의 ‘단계적 원전 축소’에 반대해 원전 확대를 주장하는 원자력 전문가들의 언론 기고나 인터뷰, 토론회 발언 등에 얼마전부터 ‘유엔 기후변화 정부간 협의체’(IPCC)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IPCC도 기후변화 막으려면 원전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이 주장의 근거는 IPCC가 2018년 10월 인천 송도총회에서 확정한 ‘지구온난화 1.5도’라는 제목의 특별 보고서입니다.
IPCC가 5~7년 마다 내놓는 기후변화 평가 보고서를 비롯한 각종 특별 보고서들은 국제사회 기후변화 대응 논의의 과학적 기초가 됩니다. IPCC 보고서가 기후변화 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이유입니다. 원전 확대를 주장하면서 IPCC 특별 보고서를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이런 권위를 이용하려는 의도입니다.
IPCC가 원전을 늘리라고 ‘권고했다’는 주장은 사실 왜곡입니다. IPCC는 특정한 정책을 단정적으로 권고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IPCC가 내놓는 보고서를 보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조심스럽습니다. 일반인들이 당연하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서술하면서도, 실제 그렇게 될 가능성을 ‘매우 희박’에서 ‘사실상 확실’까지 여러 단계로 평가해 서술합니다. 거기에 또 그 평가에 대한 신뢰도를 ‘매우 낮음’에서 ‘매우 높음’까지 덧붙입니다. 이런 IPCC가 무엇보다 논쟁의 대상인 원전을 두고 ‘확대 권고’를 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뻔한 왜곡이라고 생각하고 넘겨왔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원자력계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IPCC 보고서의 정확한 표현과 근거를 확인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지구온난화 1.5도’ 특별 보고서의 ‘정책결정자용 요약본’(SPM)에 나와 있는 원자력 관련 서술은 딱 한 문장입니다. “전력 생산에서 이산화탄소 포집 및 저장(CCS) 활용을 포함한 화석연료와 원자력의 비중은 대부분 오버슛이 없거나 제한된 1.5도 경로에서 증가하는 것으로 모델링되었다.”(기상청 공식 번역본) 이것이 전부입니다.
전 세계 전력 수요가 계속 늘어나면서 원자력 발전의 절대량도 따라서 증가하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가 폭발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전체 전원에서 원전 비중까지 늘어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원전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망은 전력망의 안정성 유지에 초점을 맞춰 전력계통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분석과도 상반됩니다.
원전은 출력 조절이 쉽지 않고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 비중이 확대되면서 점차 역할이 축소된다는 것이 이들의 전망입니다. 실제 이런 현상은 국내에서 이미 올들어 두 차례 나타난 대형 원전의 계획적 출력 감축을 통해 확인된 바 있습니다.
요약본에 ‘원전 비중 증가’ 서술의 근거로 제시된 보고서 본문 2장에는 지구온난화 1.5도 억제 목표를 달성하는 89개 경로 모델링을 종합한 자료가 2개의 표로 정리돼 있습니다. 하나는 1차 에너지 전체에서의 원자력 발전량과 비중을 따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전원 믹스에서의 원자력 발전량과 비중을 따져본 것입니다.
전원 믹스를 기준으로 한 데이터를 보면, 2020년부터 2050년 사이 전 세계 원자력 발전량 절대치는 증가하지만, 전체 전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4%p 분명히 감소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자료와 요약본에 서술된 원전에 대한 전망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IPCC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기상청 담당자에게 연락해 제네바 IPCC 사무국에 오류를 알리도록 하는 한편 IPCC에 직접 경위를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보고서 본문 2장에는 세계 각국에서 4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총괄 주저자, 주저자, 기여저자, 검토 편집자 등으로 참여했습니다. 원자력 부분의 주저자가 누군지 확인하기 쉽지 않아 일단 총괄 주저자 3명 모두에게 설명을 부탁하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총괄 주저자들에게서 원자력 부분 주저자를 알려주고 물어보라는 정도의 답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총괄 주저자 가운데 한 분에게서 뜻밖에 사실상 오류를 시인하는 답이 와서 놀랐습니다. 영국 임페리얼대의 유리 로겔 교수가 “연락해줘서 고맙다. 실로 불행한 부정확함이었다. 핵 에너지 발전은 대부분(1.5도 경로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 증가하지만 전체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로 감소한다”는 회신을 보내온 것입니다.
‘실로 불행한 부정확함’이라고 에두른 표현을 썼지만 오류를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비중은 실제 감소한다”고 덧붙여 “비중은 대부분 증가하는 것으로 모델링됐다”고 한 요약본의 서술이 틀렸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총괄 주저자인 미국 듀크대의 드루 신델 교수도 회신에서 “로겔 교수가 보낸 답변에 동의한다”고 밝혀왔습니다. 나머지 총괄 주저자인 중국의 장커쥔 교수는 회신해오지 않았지만, 다른 두 총괄 주저자가 보낸 답변을 보면 함께 상의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로겔 교수는 이후 메일에서 총괄 주저자들이 제네바 IPCC 사무국에 이 사실을 알려 수정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도 알려왔습니다.
로겔 교수가 사용한 ‘불행한 부정확함’이란 표현엔 우연이나 부주의에 의한 실수 같은 느낌이 납니다. 원자력 문제가 갖는 민감성을 생각할 때 요약본에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 원자력 관련 서술이 실수로 사실과 정반대로 들어갔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메일을 보내 부정확함이 발생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잘 바로잡을 수 있는 단순한 부정확함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IPCC가 내놓는 주요 보고서의 정책결정자용 요약본은 IPCC 총회에서 195개 회원국들의 만장일치로 채택됩니다. 총회장의 커다란 스크린에 보고서를 한 문장 한 문장 띄워놓고 모든 회원국들이 동의해야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보고서의 특정한 대목이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 논의에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어떤 나라가 끝까지 반대하면 채택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나라들을 설득해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보고서의 강조점이 달라지고 표현이 바뀌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것이 보고서 채택 과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의 이야깁니다. IPCC 보고서가 과학적 문서인 동시에 정치적 문서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입니다.
로겔 교수는 총회에 올라간 요약본에도 저자로 참여했습니다. 만약 요약본의 오류가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면 총회의 검토·승인 과정을 통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총회 참석자를 찾아 확인해 본 결과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총회 때 보고서 검토와 승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에너지경제연구원 노동운 박사는 “총회에서 참가국들이 요약본 문구를 하나하나 놓고 협상을 해 통과시키기 때문에 본문과 다른 내용이 들어갈 수도 있지만, 문제의 요약본을 채택한 인천 송도 총회 때 원자력 부분이 특별히 이야기된 것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좀 어이 없기는 하지만 ‘단순히 불행한 부정확함’이었다는, 쉽게 말해 ‘단순 오류’라는 총괄 주저자들의 설명을 믿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총괄 주저자들이 직접 수정을 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요약본이 잘못된 과정을 더 추적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원자력계와 일부 보수언론이 표현하는 것처럼 IPCC 보고서는 한국 에너지 정책의 가이드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 나라의 전원 믹스에 대한 선택은 해당 나라의 정치적 정책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이 점은 IPCC가 확인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원전의 피할 수 없는 안전과 방사성 폐기물 문제를 걱정해 ‘탈원전’을 바라는 사람들은 기후위기를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기후변화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유엔 기구가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원전을 계속 늘리라고 권고했다는 이야기는 해결할 길 없는 딜레마가 됩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니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해 한국의 전원 믹스에서 원전의 비중은 25.9%였습니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이 차질 없이 추진돼도 2050년 원전 비중은 여전히 1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IPCC 보고서에서 제시된 2050년 전세계 전망치의 두 배에 가깝습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