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인인 김광식(38)씨가 밤 늦도록 사진촬영을 하다가 환하게 웃고있다. 광식씨는 카메라를 통해 세상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대구/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애가 울지 않으믄 배고픈 것을 엄마가 모른다 아입니꺼!”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를 지닌 김광식(38)씨.
휠체어가 없으면 거의 움직일 수 없는 그는 자신의 낡은 캐논 EOS 5 필름 카메라로 틈만 나면 거리에 나서길 즐긴다.
사람을 사진에 담는 걸 좋아하는 그는 얼마전 부터 체험적으로 느껴왔던 장애인 복지문제를 자신의 주 사진꺼리(?)로 삼았기에 더더욱 손마디에 힘을 주게된다고 한다.
장애를 지닌 사람 스스로 몸이 불편하다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안되고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표현을 해야한다며 그냥 주저앉아있기를 거부한다.
88년 서울에서 열린 장애인올림픽 보치아 단체전 은메달을 따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장애를 극복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식의 비장애인들의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몸이 불편한데도 저렇게 할 수 있다니’하는 시선은 편견일 뿐, 더도 덜도 아닌 누구나 하고 있는 일상적인 활동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와의 인연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식씨는 경상북도 어느 시골농촌에 같은 장애인들과 농활을 갔었고 나는 농활이 시작한 하루 뒤 그곳을 찾았다. 도착한 시간은 늦은 오후였고 그는 한껏 땀에 젖은 몸을 씻으려고 숙소 뒤 우물가로 가고 있었다. 순간 ‘그림’이다 싶어 뒤를 따라갔고 아무런 양해도 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그는 버럭 화를 냈고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실수를 깨달은 나는 죄송소리를 연발하며 우물가를 빠져나왔다. 저녁시간 나는 다시 깊은 사과의 마음을 전했고 그는 “예의를 지켜달라”며 훈계를 거듭했다. 그리고 밤깊도록 그와 술잔을 나누며 서로의 속뜻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나눴다. 먼저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관계의 중요성을 그에게 배웠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후 자주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형님 동생 사이로 이어졌다.
부모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그는 수세미, 칫솔 등을 파는 잡화노점을 비롯해 과일을 팔아 생활비를 벌어가며 어렵게 삶을 이어오면서도 장애문제를 넘어 사회전반에 걸친 관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대구역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센터에서 설거지를 담당하기도 했고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때는 남북 공동응원을 위해 아리랑응원단에서 붉은 티를 입고 한반도기를 흔들기도 했다.
그때 본 북녘처녀들을 보면서 ‘화합’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됐다는 그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참 바쁘게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다닌다.
“행님! 내는 장애인을 장애인처럼 안본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어예.”
무언가 극복의 대상으로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에 대한 불쾌감(?)을 경계하는 그는 대학의 복지전공 과정에서부터 장애인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한다며 단순히 시설을 바꾸고 정책을 보완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일침을 가한다.
궁극적으로 ‘장애인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규정’된 인식의 틀이 있기에 자신은 끊임없이 참여하고 발언을 하며 싸우기도 한단다.
그는 덥수룩하게 긴 머리를 묶고 때론 노란색으로 염색도 즐기며 꽤 공을 들여 콧수염을 기른다.
“이러는 거 다 나름 사회에 대한 반항인기라예.”
‘비장애인들이 똑같이 머리 기르고 염색하고 수염을 기르면 멋있다고들’ 하면서 자신이 그러면 깨끗하지 못하다고 욕을 하더라고 겪었던 일들을 풀어놓을 때는 잔뜩 눈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는 그는 “그게 진절머리 나서 일부러 더 그러는거니 그렇게 이해해 주이소”라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엄청 부지런하다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하길 좋아하는 그이기에 비만 오지 않는다면 바쁘게 어디든 움직인다. 그의 말마따나 ‘원하는 대로 못움직이니까 조금 “불편”한 게 있지만 아무런 방해는 안된다’는 그이기에 오늘도 여전히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2년 전 정부와 기업의 기금으로 전동휠체어를 받은 뒤 한층 몸이 가벼워진 그는 훨씬 빨라진 걸음걸이를 기뻐한다. 휠체어 뒤에 튼튼한 삼각대까지 싣고 다니는 그는 천천히 자신의 관심대상에 눈을 준 뒤 성급하지 않게 셔터를 누른다.
몇 해 전 통째로 카메라를 도둑맞기도 했다가 다시 어렵게 장만한 낡은 카메라를 그는 소중히 아낀다. 카메라끈을 목에 꼭 두르고 그다운 환한 미소를 머금고는 그렇게 거리로 나선다.
워낙 이리저리 돌아다니길 좋아하니 때론 쉽게 그를 만날 수도 있다.
“장애인은 사진은 안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지예. 그러니 더 해볼라카는 거라예.”
혹시 사진찍는 광식씨가 괜찮아보인다면 한가지 그를 도울 길은 있다.
그는 요즘들어 흑백사진을 찍고 있으며 좋아하는 필름은 코닥 TMX 400 필름이다.
술값 조금 줄이고(^^) 그에게 필름 몇 롤 보내줘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대구/사진 글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작업을 하는 김광식(38)씨. 대구/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88년 서울에서 열린 장애인올림픽 보치아 단체전 은메달을 따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장애를 극복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식의 비장애인들의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몸이 불편한데도 저렇게 할 수 있다니’하는 시선은 편견일 뿐, 더도 덜도 아닌 누구나 하고 있는 일상적인 활동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와의 인연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식씨는 경상북도 어느 시골농촌에 같은 장애인들과 농활을 갔었고 나는 농활이 시작한 하루 뒤 그곳을 찾았다. 도착한 시간은 늦은 오후였고 그는 한껏 땀에 젖은 몸을 씻으려고 숙소 뒤 우물가로 가고 있었다. 순간 ‘그림’이다 싶어 뒤를 따라갔고 아무런 양해도 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그는 버럭 화를 냈고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실수를 깨달은 나는 죄송소리를 연발하며 우물가를 빠져나왔다. 저녁시간 나는 다시 깊은 사과의 마음을 전했고 그는 “예의를 지켜달라”며 훈계를 거듭했다. 그리고 밤깊도록 그와 술잔을 나누며 서로의 속뜻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나눴다. 먼저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관계의 중요성을 그에게 배웠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후 자주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형님 동생 사이로 이어졌다.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인인 김광식(38)씨가 자신의 캐논 EOS 5 필름카메라를 들고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에서 사진촬영을 하고있다. 휠체어가 없으면 거의 움직일 수 없는 김씨는 불편한 몸으로서 스스로 느껴왔던 체험을 바탕으로 장애인복지개선과 관련된 사진작업을 하고싶어한다. 대구/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전국 장애인체전에서 한발 한발 정성을 다하는 장애인 양궁선수를 찍은 광식씨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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