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장애 1급인 김동림(48·오른쪽)씨가 ‘체험홈’ 앞에서 함께 사는 김진수(61)씨와 나란히 앉아 있다. 두 사람은 각각 22년, 20년 만에 장애인시설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20일 장애인의 날] 홀로서기 꿈 이룬 뇌병변장애 1급 김동림씨
22년 만이다. 25살에 장애인시설에 들어간 뇌병변장애 1급 김동림(48)씨는 47살에 그곳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지난해 6월4일, 경기도 김포에 있는 ㅅ시설 문턱을 넘어 세상으로 나올 때는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시설에서 살기 싫습니다.” 62일 동안 이어진 노숙농성 끝에, 김씨는 서울시에서 “살 곳을 마련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지난 14일, 김씨가 살고 있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 집을 찾았다. 가족행복 위해 들어온 시설
쳇바퀴 같은 일과에 지쳐
“자립지원 해달라” 노숙농성
서울시 정착금·체험홈 받아
식사도 외출도 공부도 자유
전국일주 여행 ‘새로운 꿈’도 # 시설에 들어가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김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뇌위축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뇌가 조금씩 굳어지는 병이다. 외할아버지가 같은 병을 앓아, 아마도 유전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손과 다리를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돼 학교도 그만두고 집에서만 지냈다.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저거(김씨)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소리를 치며 어머니와 싸웠다. 김씨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장애 탓에 가족이 불행해지는 게 싫었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장애인시설이 나왔는데,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가족들도 더 이상 저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되고요.” 결국 그는 25살 때 장애인을 돌봐준다는 ㅅ시설에 들어갔다.
김씨는 그곳에서 5명과 함께 방을 썼는데, 모두 50~60대였다. 밖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한두 차례 있는 사회적응 훈련 때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방에서 지냈다. 가족들도 김씨에게 알리지 않고 전화번호를 바꿔 연락이 끊어졌다. 꿈도 희망도 없이 20년 동안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는 생활에 지쳐갔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무렵 ㅅ시설의 비리 문제가 불거졌고, 김씨와 일부 동료들은 “여기를 믿을 수 없으니 나가자”고 뜻을 모았다. 이들 중에는 10살 때 장애인시설에 들어와 28년을 지낸 사람도 있었다. # 다시 세상 속으로 김씨와 동료 7명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시설 직원들이 말렸지만 이번에 나가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내 2009년 6월4일 시설을 나왔고, 장애인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우리의 요구는 간단했어요. 장애인도 어떻게 살지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예요. 자립을 원하면 생활이 가능하도록 주거 등을 지원해 달라는 거죠.” 김씨는 노숙농성으로 몸이 점점 굳어져, 여러 차례 병원에 실려 갔다. “그때는 우리가 아무리 투쟁해도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지만, 해볼 때까지 해보자는 심정이었어요.” 결국 62일 만에 서울시는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돕는 ‘장애인전환서비스센터’와,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들이 최고 5년 동안 살 수 있는 ‘자립생활가정’을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씨는 현재 동료 2명과 함께 자립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시가 제공한 ‘체험홈’에서 지내고 있다. 초기 정착금 500만원도 받았다. # 사랑 그리고 꿈 시설에 있을 때 김씨는 정해 놓은 시간 때문에 하루종일 시계를 보며 살았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밤늦도록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마냥 신난다고도 했다.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남산도 가고, 대학 캠퍼스도 돌아봤다. 공부하는 재미에도 푹 빠져 있다. 일주일에 세 차례 야학에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김씨는 앞으로 검정고시를 치를 생각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다. 여자친구 얘기가 나오자 금세 얼굴을 붉히며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꿈이 하나 생겼다. “전국일주를 하고 싶어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전국을 돌아다니는 게 쉽지 않겠지만, 뭔가 부딪혀 보고 싶습니다.” 시설에서 나온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그는 “지금 많이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글·사진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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