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과친구하기■ 담낭암 극복한 한경희씨
“제가 암하고 인연이 많은가봐요. 담낭암에 걸리기 이전에도, 암환자만 보면 저절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2002년 7월 쓸개(담낭)에 생긴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한경희(58·경기 남양주시 퇴계원)씨는 ‘암은 곧 죽음’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떨쳐내고 ‘암과의 인연’을 거론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처음에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이전에 누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죄진 것으로 생각했어요. 정작 내가 암에 걸리자, ‘무슨 죽을죄를 지었기에’하는 자책감이 한없이 밀려왔죠. 또 남한테 모든 책임을 씌우고 원망하기도 했어요.”
암을 천벌로 생각할 정도로 암에 대해 무지했던 그는 담낭암 수술 뒤 극심한 불안증에 시달렸다.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빨랫줄로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는 등 불안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당시 한양대 구리병원에서 담낭암 수술을 받았는데 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한 여의사가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무서워했다.”면서 “하지만 그 의사는 요즘 병원에서 마주치면 그 때 생각이 나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마구 웃는다.”고 말했다.
그와 암의 인연은 담낭암에 걸리기 전에 같은 교회에 다니던 신도들 가운데 말기암으로 병원 입원치료를 포기한 채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교회에서 암환자를 돌볼 사람을 찾았는데, 왠지 마음이 쏠려 호스피스 활동을 하게 됐어요. 당시 말기암환자들만 돌봤기 때문에 암에 걸리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지요. 암을 이겨낼 수 있다고는 꿈도 못 꾼 겁니다.” 담낭암 수술을 받고 난 뒤, 절망감에 휩싸인 나머지 곧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노인들의 안식처인 ‘평안의 집’에 입소한 것도 ‘암은 곧 죽음’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후일담이다. 말기암환자 호스피스하다 발견…절망감에 정신과 치료 받기도
‘죽더라도 남을 돕자’는 마음먹자 성격 대범해지고 여유 생겨 그가 담낭암을 발견하게 된 사연도 암과 관련이 있다. 호스피스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샘물호스피스선교회가 운영하는 말기암환자 보호시설인 ‘샘물의 집’에서 호스피스 봉사교육을 받던중 오른쪽 옆구리 위쪽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는 것이다. 즉시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은 결과 담낭암 2~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행운이었다. 담낭암은 50대 이상의 여성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조기 발견이 어렵고 진행이 빨라 대부분 1년 안에 숨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평안의 집까지 가기도 했지만 암에 걸린 것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결국 죽을 때 죽더라도 내 식구를 괴롭히지 말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지요.” 담낭암을 발견한지 만 4년이 다 되도록 암재발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는 암에 걸린 것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남한테 절대 싫은 소리를 못하는 꽁한 성격도 많이 바꿨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청상과부가 된 뒤 외동아들을 키우며 혼자 살아온 시어머니를 30년간 모시고 있는 그는 고부갈등으로 스트레스가 쌓이면 많이 먹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습관은 남편 탓이기도 했다. ‘나 한테는 잘 못해도 좋으니 시어머니한테 잘 하라’고 말할 정도로 효자인 남편은 고부갈등이 생기면 시어머니만 차에 태우고 나가 기분전환을 시켜준 뒤 들어오곤 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내 속이 탔으면 탔지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했어요. 스트레스가 생기면 그때그때 적절하게 풀지 못했던 거지요. 하지만 지금은 욕을 먹든지 말든지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은 다 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따듯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내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구리병원에 나와 암환자들에게 상담을 해주는 등 자원봉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노인요양원에 보내려고 이곳저곳 알아보기도 했지만 시어머니가 요양원에서 숨지면 내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아 계속 돌보고 있다.”면서 “치매 노인을 잠깐잠깐씩 맡아주는 시설을 국가에서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리/글·사진 안영진 기자 youngjin@hani.co.kr
“교회에서 암환자를 돌볼 사람을 찾았는데, 왠지 마음이 쏠려 호스피스 활동을 하게 됐어요. 당시 말기암환자들만 돌봤기 때문에 암에 걸리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지요. 암을 이겨낼 수 있다고는 꿈도 못 꾼 겁니다.” 담낭암 수술을 받고 난 뒤, 절망감에 휩싸인 나머지 곧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노인들의 안식처인 ‘평안의 집’에 입소한 것도 ‘암은 곧 죽음’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후일담이다. 말기암환자 호스피스하다 발견…절망감에 정신과 치료 받기도
‘죽더라도 남을 돕자’는 마음먹자 성격 대범해지고 여유 생겨 그가 담낭암을 발견하게 된 사연도 암과 관련이 있다. 호스피스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샘물호스피스선교회가 운영하는 말기암환자 보호시설인 ‘샘물의 집’에서 호스피스 봉사교육을 받던중 오른쪽 옆구리 위쪽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는 것이다. 즉시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은 결과 담낭암 2~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행운이었다. 담낭암은 50대 이상의 여성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조기 발견이 어렵고 진행이 빨라 대부분 1년 안에 숨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평안의 집까지 가기도 했지만 암에 걸린 것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결국 죽을 때 죽더라도 내 식구를 괴롭히지 말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지요.” 담낭암을 발견한지 만 4년이 다 되도록 암재발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는 암에 걸린 것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남한테 절대 싫은 소리를 못하는 꽁한 성격도 많이 바꿨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청상과부가 된 뒤 외동아들을 키우며 혼자 살아온 시어머니를 30년간 모시고 있는 그는 고부갈등으로 스트레스가 쌓이면 많이 먹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습관은 남편 탓이기도 했다. ‘나 한테는 잘 못해도 좋으니 시어머니한테 잘 하라’고 말할 정도로 효자인 남편은 고부갈등이 생기면 시어머니만 차에 태우고 나가 기분전환을 시켜준 뒤 들어오곤 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내 속이 탔으면 탔지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했어요. 스트레스가 생기면 그때그때 적절하게 풀지 못했던 거지요. 하지만 지금은 욕을 먹든지 말든지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은 다 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따듯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내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구리병원에 나와 암환자들에게 상담을 해주는 등 자원봉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노인요양원에 보내려고 이곳저곳 알아보기도 했지만 시어머니가 요양원에서 숨지면 내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아 계속 돌보고 있다.”면서 “치매 노인을 잠깐잠깐씩 맡아주는 시설을 국가에서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리/글·사진 안영진 기자 young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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