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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8 17:43 수정 : 2005.03.08 17:43

③ 알코올은 창작의 촉매?


뇌활동 떨어져 불안감 지워
엔도르핀 ‘퐁퐁’ 행복감 물씬


기억력·주의력·통제력 마비
‘필름’ 끊기고 사고위험 아찔

‘오늘날 문학은 술에 절어 있다’는 알렉상드르 라크루아의 말처럼, 술은 위대한 소설가나 화가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창작의 원동력’이 되곤 한다. <전쟁과 평화>를 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나 인상적인 초상화를 남긴 ‘파리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는 평생 폭음을 즐겼고,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대표하는 보들레르와 랭보 역시 술 없이는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었던 알코올 중독자였다.

실제로 1858년 보들레르가 <인공낙원>이라는 작품을 출간하자, 이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당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반복적인 폭음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알코올 중독'이라는 말이 사전에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 베들렘 로얄 병원에서 연구하는 포스트 박사가 1995년 ‘20세기 위대한 인물’ 291명을 조사한 결과, 소설가나 화가 같은 예술가 중에 알코올 중독 발병률이 일반인들의 평균 발병률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으며, 대부분 우울증을 동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는 과학자나 기업인, 정치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치였다.

‘늘 술에 절어 있는 예술가’라는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 영 엉터리는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예술가의 창조력과 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술이 뇌기능을 활성화해 언어능력을 향상시키고 상상력을 북돋우며, 예술적 재능을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주술적 촉매’라도 되는 걸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술이 뇌에서 하는 일은 이와는 정반대다. 폭음을 하거나 알코올 중독이 되면, 언어구사능력과 처리 속도, 기억력과 주의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제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말은 어눌해지고, 한곳에 집중하는 시간도 짧아지며, 복잡한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기능이 현격히 떨어진다.


운동조절능력도 줄어들어서 균형을 잡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근육이완능력도 눈에 띄게 느려진다.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동안 술과 관련된 교통사고로 수백 명 이상 사망하는 것도 바로 이런 술의 부작용 때문이다.

특히 알코올은 신경세포 사이에서 방출되는 글루탐산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방해하는데, 이 물질은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해마라는 영역이 제 기능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폭음을 하면 술 마시는 동안 벌어졌던 일들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지 못해 전날 벌어진 일들을 다음 날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른바 ‘필름이 끊기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알코올이 뇌에서 부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유익한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감정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다. 우리 뇌에는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영역이 있는데, 알코올이 이곳에 들어가면 뇌 활동을 떨어뜨려 단기적으로나마 신경안정제처럼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덜 느끼도록 도와준다.

또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늘려 우울증을 줄여주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알코올 중독과 함께 우울증 발병율도 높은 것으로 보아, 그들이 우울증을 다스리기 위해 술을 반복적으로 먹지 않았나 추정된다.

게다가 술은 즐거운 기분이나 도취감을 느끼는 보상회로를 자극해, 사람을 들뜨게 하거나 묘한 도취감에 젖어들게 하기도 한다. 마약 같은 ‘위조 엔도르핀’으로 작용해서가 아니라, 체내의 엔도르핀 저장고에 구멍을 내고 엔도르핀 방출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효과가 크지 않아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술은 때론 감정을 진정시켜주기도 하고 때론 도취감에 흥분시켜주기도 하는, 우리 뇌의 브레이크이자 액셀레이터인 것이다.

아마도 예술가들이 술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죽음만큼 힘겨운 창작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 혹은 음주로 고취된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즉흥적 영감을 빌리기 위해서, 오늘도 예술가는 술병에 손이 가는 것일 게다.

알코올 중독이나 폭음이 뇌 기능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술이 어떻게 디오니소스적인 열정을 다스리고, 창조적 개인의 삶에 유익함과 해악을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사와 과학자들이 앞으로 연구해야할 부분이 더 많다. 알코올이 창조력이나 상상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정재승 교수/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및 미국 콜롬비아의대 정신과 jsjeon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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