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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가난에 막힌 15살 은경이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안 보여요”

등록 2006-12-07 08:27수정 2006-12-12 16:49

양지마을 은경이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수미의 한달 가계부
양지마을 은경이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수미의 한달 가계부
[김기태기자 달동네에서 한달]
가난에 막힌 15살 은경이의 눈물
기자와 말을 나누다가 은경(15·가명)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눈물에 당황하지도, 눈물을 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은경이는 처음 기자를 대면한 때의 그 표정과 어투로 계속 담담히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3인 이 여자아이에게 눈물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닌 듯했습니다.

정부 보조금 받아 아빠와 생활
차비 모자라 하교땐 걸어서…간식도 특강도 엄두못내

은경이는 양지마을에서 아빠와 같이 삽니다. 갓 돌을 넘었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은경이는 아빠가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가 아픈 아빠는 정부가 주는 한달 40만원으로 생활합니다. 은경이는 여기에서 8만원을 받습니다. 5만원은 용돈이고, 3만원은 차비입니다. 어느쪽으로나 다 모자랍니다. 스타킹, 문구, 교재, 간식, 생리대 등을 사려면 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버스는 등교할 때만 탑니다. 집에 올 때는 30분 거리를 혼자 걷습니다. 내년에 거리가 먼 ㄱ·ㄴ고등학교로 배정될까봐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학원을 갈 때도 주로 걷습니다. 복지기관이 추천을 해줘 무료로 종합반을 듣습니다. 은경이가 양지마을 학생들 중에선 공부를 잘 하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내신 3등급 정도의 실력입니다. 수학을 잘 못해서 강의를 더 듣고 싶지만, 가끔 있는 특강은 엄두도 못냅니다. 특강료가 12만원이라 아빠한테 말도 못 꺼냈습니다. 학원에서 저녁 때가 되면 배가 고픕니다. 다른 아이들이 매점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살 때, 은경이는 ‘살 수 있는 것’을 사거나 그냥 지나칩니다.

해질무렵 상계동 양지마을 주택의 지붕.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해질무렵 상계동 양지마을 주택의 지붕.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주변에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친구는 없습니다. 같은 반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있지만, 그 친구는 그래도 할머니와 어머니가 수입이 있습니다. 그 친구마저 자기 처지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면 은경이는 입을 다뭅니다. 집 사정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저런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선생님들은 티나지 않게 급식비나 수학여행비 같은 것을 무료로 처리해주셨습니다. 은경이는 때로는 상대방의 바람에 맞게 가식적으로 가난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래야 자기한테 혜택도 많이 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싫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애들 앞에서 자기 처지가 드러나는 것도 싫습니다. 반 친구들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영화 싫어한다고 답하고, 놀이공원 가자고 하면 그것도 싫어한다고 말했습니다.


가난 과장하기 싫은데…
작가도 고고학자도 배고픈 직업이라기에 포기

은경이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6학년 때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꿈이 작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돈을 잘 못 번답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고고학자도 되고 싶었는데, 같은 이유로 접었습니다. 앞으로 뭘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기로 결심은 했는데, 아직도 헷갈립니다. 주변에선 실업계로 가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공부 잘하는 애들과 경쟁해서 대학을 가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비싸다는 대학 등록금도 벌써 걱정입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걱정입니다. 아빠에게 나오는 지원금도 끊기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은경이가 가장이 될 겁니다. 고모댁에 오래 맡겨졌던 은경이는 아빠에게 정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빠가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은경이는 소원이 ‘생각없이 사는 것’입니다. 생각과 걱정이 많다 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나 중학교 1학년 때는 걷다 보면 어디든 금방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얼마전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젠 생각을 조금 덜 하기로 했답니다.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아무 생각없이 ‘티머니 카드’를 써보고 싶고, 걱정 없이 옷도 사고 싶습니다.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아이들이 은경이는 부럽습니다.

은경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은 이 말을 할 때였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할 때도 안 그랬는데, 스스로 고단한 생활을 지탱해야 한다는 무서운 현실감이 이 아이에겐 엄마에 대한 그리움 따위보다 더 눈물나는 일인가 봅니다.

지난달 29일 제가 사는 양지마을에 있는 나눔의 집 공부방에서 은경이를 만났습니다. 쉽지 않은 인터뷰에 응해준 은경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양지마을 공부방서 만난 아이들
양지마을 공부방서 만난 아이들

11명중 8명이 ‘한부모 가정’
“엄마랑 같이 살았으면…”

[김기태기자 달동네에서 한달] ② 양지마을 공부방서 만난 아이들

양지마을 공부방에서 만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ㄱ) 최진철(12) 아빠는 회사 택시를 모십니다. 원래 카센터를 했는데 장사가 잘 안돼 1학년 때 장사를 접었습니다. 12살 더 많은 형은 자동차 정비를 합니다. 엄마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커서 박찬호같은 야구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운동은 잘 못합니다.

양지마을 공부방서 만난 아이들
양지마을 공부방서 만난 아이들
ㄴ) 석재민(12) 아빠는 무직인데, “술 먹고 담배 필 때만 빼고” 좋습니다. 엄마는 여섯살 때 집을 나갔습니다. 엄마가 1년에 두세번 정도 보러옵니다. 엄마랑 같이 살면 안되냐고 아빠한테 물었지만, 아빠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크면 ‘굿 네이버스’ 같은 단체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인도 같은 곳에서 불우 이웃을 돕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대학에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만 같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못 갈 거” 같습니다. 공부가 “꼴찌는 아닌데, 중간에서 뒤쪽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ㄷ) 조명수(11) 엄마는 “돈 벌러 간다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아빠랑 동생이랑 같이 삽니다. 아빠는 중국집에서 배달을 합니다. 중국집에서 먹는 자장면을 아주 좋아합니다. 소원은 “엄마랑 다 같이 사는 거”입니다. 나중에 커서 피시방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액션 게임 ‘던전 앤드 파이터’를 실컷 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빠한테 하루에 500원씩 받는 용돈을 모아 토요일에 피시방에 갑니다.

ㄹ) 이선민(7) 수줍음이 많습니다. 엄마랑 같이 살다가 “(우리나라 나이로) 빠른 여덟살” 때 아빠에게로 왔습니다. 예쁜 엄마를 자주 못봅니다. 아빠는 자꾸 구구단 외우라고 하고, 틀릴 때마다 때려서 싫습니다.

ㅁ) 김미희(13) 아빠랑 오빠랑 같이 삽니다. 엄마는 집을 나갔습니다. 일주일 전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아빠랑 엄마랑 막 싸우길래 공부방으로 와 버렸는데, 그 이후로 엄마가 안 보입니다. 엄마는 일곱살 때부터 올해 초까지도 집에 없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빠는 노동일을 합니다. 공부 잘 하는 오빠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오빠는 돈 더 벌어서 대학교에 갈 거라고 합니다. 오빠가 휴대전화 사준다고 해놓구선 자꾸 안 사줍니다. 커서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가족들이 더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ㅂ) 류진서(13) 부모님과 남동생하고 삽니다. 아빠는 공무원이고, 엄마는 가정주부인데 부업으로 자개를 붙이거나 바지를 꿰매거나 “별 걸 다” 합니다. 같은 반 아이들은 거의 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없어서 속상합니다. 부모님에게 졸라도 소용 없습니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시험입니다. 국어하고 수학이 싫습니다. 나중에 커서는 장애인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아침 잠이 많아서, 등교시간이 11시로 미뤄졌으면 좋겠습니다.

ㅅ) 이정인(14) 아빠와 엄마는 2년 전 이혼했습니다. 아빠는 이삿짐 옮기는 일을 하십니다. 엄마는 식당일을 합니다. 엄마를 떠나 아빠랑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공부는 잘 못합니다. 커서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ㅇ) 신명지(12) 엄마와 외삼촌, 동생과 같이 삽니다. 엄마는 여덟살 때 아빠와 이혼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엄마는 “건물 짓는 거”를 합니다. 가끔 보는 아빠는 보기 싫습니다. 왜 그런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빠는 전기 쪽 일을 합니다. 나중에 커서 간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픈 사람들 도와주고 싶습니다.

ㅈ) 윤현선(13)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동생이랑 같이 삽니다. 아빠와 새엄마는 걸어서 20분쯤 거리에 떨어져 삽니다. 아빠는 통신 쪽 일을 하십니다. 집에 있으면 왠지 답답합니다. 방을 따로 구해 독립하고 싶습니다. 음식 버리는 사람들이 제일 싫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집안에 망신을 주는 일입니다. 현선이는 음식이 맛이 없어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ㅊ) 노세은(12) 부모님은 세은이가 3학년 때 이혼했습니다. 지금은 엄마랑 누나랑 같이 삽니다. 엄마는 집에서 자개 붙이는 일을 합니다. 엄마 팔이 아파서 걱정입니다. 아빠는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한달에 한두번씩 와서 돈도 주고, 먹을 것도 사줍니다. 가장 속상할 때는 친구들이랑 싸울 때입니다. 커서 댄스 강사가 되고 싶습니다. 춤추면 기분이 좋기 때문입니다.

ㅋ) 설동훈(10)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삽니다. 공항에서 일하는 아빠는 두달에 한번 집에 옵니다. 동훈이가 “아주 어릴 때” 어느날 엄마는 아빠랑 동훈이랑 피자를 먹었습니다. 그 이후에 엄마는 떠났습니다. 가래가 많이 나오는 할아버지는 종이 박스를 모읍니다. 할머니는 다리가 많이 아픕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같이 방에서 자는 동훈이는 아빠가 오는 날에는 거실에서 아빠랑 같이 잡니다. 그렇지만 아빠가 공부하라고 자꾸 혼내서 싫습니다.

본지 김기태 기자
본지 김기태 기자
양지마을은 서울 노원구 상계4동 15~17통 일대 언덕에 걸쳐 있다. 마을이 자리잡은 언덕은 조선시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 묘가 가까워 ‘덕릉고개’라고도 불린다.

공동묘지로 쓰이기도 했던 이곳에 1960년대 중반 남산과 종로 등지에서 재개발에 밀려온 철거민들이 정착했다. 마을 땅의 90% 정도는 산림청 소유고, 주택 가운데 열에 아홉은 무허가다.

주민 2383명 가운데 국민기초생활 수급자는 236가구 348명, 장애인은 546명이다. 어머니만 있는 가정은 26가구다.

서울 노원구 상계4동 나눔의 집 공부방에서 방과 후 활동을 마친 학생들이 지난 5일 저녁 환하게 불이 켜진 공부방 창문을 뒤로 한 채 마을로 내려가고 있다. 아이들은 학원에 갔다가 다시 공부방으로 돌아와 보통 밤 9시까지 머문다. 이정아 기자 <A href="mailto:leej@hani.co.kr">leej@hani.co.kr</A>
서울 노원구 상계4동 나눔의 집 공부방에서 방과 후 활동을 마친 학생들이 지난 5일 저녁 환하게 불이 켜진 공부방 창문을 뒤로 한 채 마을로 내려가고 있다. 아이들은 학원에 갔다가 다시 공부방으로 돌아와 보통 밤 9시까지 머문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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