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난 4월 케이티앤지(KT&G) 등 국내외 담배회사 4곳을 상대로 제기한 흡연 피해 소송의 첫 변론이 12일 열린다. 정부 산하기관이 소송의 원고로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과거 개인이 제기한 소송과 무게감이 다르다. 소송가액은 537억원에 이른다. 11일에는 담뱃세 인상안 등을 담은 정부의 종합적 금연 대책도 나온다. 담배에 붙는 각종 세금을 올려 담뱃값 인상을 유도하면, 금연율이 덩달아 높아지리라는 게 정부의 계산이다. 담배업계로서는 이중의 시련이 아닐 수 없다. <한겨레>는 한국에 앞서 ‘담배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캐나다 밴쿠버를 지난 5월 말 찾았다. 모두 주정부 차원에서 담배회사를 상대로 흡연 피해 소송을 낸 곳이다. 이 내용을 2차례에 나눠 싣는다.
개인소송은 연전연패였다
주정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내부고발자들 용기를 얻고
담배회사 위법 만천하에
드디어 협상이 시작됐다
“1980년대 25%나 되던 흡연율이 2013년 8.5%까지 떨어진 데에는 공공장소 금연 등의 정책과 더불어 무엇보다 흡연 피해 소송이 가장 큰 구실을 했다고 봅니다. 흡연 피해 소송 과정에서 담배의 해로움뿐만 아니라 담배회사의 위법성이 사람들한테 널리 알려진 덕분이죠.”
1960년대부터 등장한 미국의 담배 광고 사진들. 담배회사들은 흡연이 건강에 해롭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줄 목적으로 유명 영화배우는 물론 심지어 의사도 담배 광고에 등장시켰다. 배우 시절 담배 광고 모델로 나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캐런 리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무부 담배규제국장은 주정부가 흡연으로 인한 질병 치료비를 반환하라며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성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리프 국장은 주정부가 나서자 폐암이나 심장·혈관 질환 등 각종 질환을 일으키는 흡연의 폐해뿐만 아니라 담배회사가 중독을 유발하려고 니코틴 농도까지 조작한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리프 국장과의 만남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케이티앤지(KT&G) 등 국내외 담배회사 4곳을 상대로 흡연 피해 배상 소송 방침을 밝힌 직후인 지난 5월 미국 현지에서 이뤄졌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흡연 피해 배상 소송의 첫 변론이 12일 시작된다. 국내 흡연 피해 소송은 걸음마 단계다. 1990년대 후반 흡연 탓에 폐암에 걸렸다며 담배회사를 상대로 보상 소송을 낸 원고 쪽에 대법원은 지난 4월 패소 판결을 내렸다.
흡연 소송의 역사가 훨씬 오래된 미국도 처음엔 우리와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1954년 흡연 피해자의 첫 소송 제기 뒤 1990년대 초반까지 개인 피해자의 소송 800건가량이 줄을 이었지만 모두 패소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의 한 담배가게에서 담배를 사들고 나온 시민(맨 오른쪽 여성)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거리 흡연에 제한이 없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흡연 피해 소송을 한 뒤 흡연율이 크게 떨어져 거리에서 흡연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주정부가 이런 흐름을 바꿨다. 1994년 미시시피주를 시작으로 1996년 캘리포니아 등 9곳 주정부가 흡연 피해 소송에 나섰다. 1997년엔 그 수가 50곳까지 늘었다. 주정부가 대거 소송에 나서자 사정이 달라졌다. 개인 흡연 피해자는 오랜 소송의 변호사 비용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무엇보다 흡연의 피해를 입증할 통계 자료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주정부는 저소득층 치료에 정부 예산을 투입하는 만큼 이들의 의료보험 자료를 바탕으로 흡연 피해에 따른 구체적인 진료비 등을 제시할 수 있었다. 공신력과 실행력이 높은 주정부가 나서자 담배회사에서 내부고발자가 나타났다. 그 덕에 소송 제기 2년 만에 필립모리스 등 세계적인 담배회사가 막대한 배상금을 물기로 하고 합의에 나섰다.
데니스 에커트 전 캘리포니아주 법무부 담배규제국장은 “담배회사의 내부고발자들이 결정적이었다. 이들 덕분에 담배회사의 위법성이 널리 알려져 담배회사에 불리한 여론이 조성되자 담배회사가 협상을 요청해왔다”고 전했다. 실제 1994년 미시시피주가 흡연 피해 소송을 제기하자 빅터 데노블 전 필립모리스 연구원이 주의회에서 “담배는 니코틴 중독을 일으켜 흡연자의 자유의지로 끊을 수 없다”고 폭로했다. 그 한달 뒤에는 흡연 피해 소송을 당한 담배회사의 변호를 맡은 로펌이 담배의 위해성을 담은 담배회사의 비밀문서를 스탠턴 글랜츠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한테 건넸다. 세계적인 금연운동가로 꼽히는 글랜츠 교수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결국 1998년 11월 담배 회사들이 25년 동안 2460억달러(약 260조원)를 배상하기로 합의하고 소송을 끝냈다. 주정부들이 소송을 끝까지 끌고 갔더라도 담배회사들이 패소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정부가 거둔 성과를 토대로 개인 흡연 피해자들도 담배회사와의 소송에서 승리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2001년 플로리다주와 2005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흡연 피해자들이 담배회사한테서 각각 109만달러와 1050만달러를 배상받는 판결이 나왔다.
소송 과정에서 밝혀진 담배의 위해성과 담배회사의 위법성은 흡연율을 크게 낮추는 데 기여했다. 공공장소나 건물 안에서 흡연을 제한하는 등 각종 금연정책 시행에도 도움이 됐다. 리프 국장은 “담배 광고나 흡연장소 제한 정책도 그동안 담배회사들의 로비로 시행이 힘들었는데 흡연 피해 소송 뒤 담배회사가 꼬리를 내려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캐나다도 주정부가 흡연 피해 소송에 앞장서는 나라다.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주정부가 소송에 나섰을 때 (직접 피해자가 아닌) 주정부가 나서는 건 위헌이라고 담배회사들이 소송을 낸 선례를 반면교사 삼아, 주정부가 담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도록 따로 법률을 만들었다. 1997년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담배손해배상법’을 내놨으나 담배회사들이 위헌 소송을 제기해 2000년 위헌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담배손해 및 치료비배상법’을 만들어 결국 2005년 9월 효력이 발휘됐다. 온타리오주와 앨버타주도 흡연 피해 소송에 동참했다. 밴쿠버에서 <한겨레>와 만난 에릭 리그레즐리 담배 소송 전문 변호사는 “캐나다도 미국처럼 흡연 피해자 개개인이 패소하다 주정부가 나설 법률적 근거가 마련된 뒤 승소하기 시작했다. 담배회사는 법원이나 흡연자 단체 등에 집요한 로비를 했지만 돌아선 여론을 견디지 못했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밴쿠버/글·사진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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