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부가 당사자로 나선 흡연피해소송에서 미국은 사실상 승소했고 캐나다는 현재진행형이다. 각국 주정부의 적극적 참여가 담배소송에서 일대 전환점이 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담배회사들은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대형 법률회사를 고용했고 소송 전략도 매우 비타협적이었다. 심지어 소송을 제기한 원고를 위협하거나 흡연자단체를 활용해 여론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흡연피해소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미국과 캐나다의 전문가들은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의 소송도 앞길이 험난하리라고 내다봤다. 이들은 우선 흡연자를 건보공단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흡연이 자발적 선택에 따른 자기 과실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켜 흡연자들이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흡연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에 막대한 손해가 유발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할 책임도 크다.
■ 흡연자 돕는 금연정책 같이 가야 건보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흡연피해소송을 제기한다고 하자 가장 먼저 담배소비자단체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사단법인 한국담배소비자협회는 지난 4월 “건보공단이 흡연자의 치료를 위해 지출한 비용의 구상권을 구실삼아 담배소송을 벌이는 것은 건보공단의 부실 운영 책임을 흡연자와 담배회사에 전가하려는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라는 성명서를 냈다. 흡연자들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에 문제가 생긴다는 논리는 ‘마녀사냥’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흡연자를 비난하기보다 담배회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닐 베노위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의대 교수는 “흡연자한테서 직접 ‘죄악세’를 걷거나 이들 탓에 재정 지출이 늘어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 흡연자들은 담배회사의 판맥 전략에 속아 니코틴에 중독된 피해자다. 이들이 담배를 끊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수다”라고 말했다.
소송 과정에서 담배회사의 위법성이 드러나면 자연스럽게 흡연자들도 소송에 적극 나서리라는 전망도 있다. 리처드 폴레이 브리티쉬 콜럼비아대 교수는 “담배회사가 건강에 해가 되는 상품을 팔았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알려야 한다. 이는 과학연구로는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지만 흡연자들은 잘 모른다.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더 많은 세금을 낼 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망친 사실을 알게 되면 흡연자들의 태도나 인식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흡연자 치료비 구상권 청구
비자발적 흡연 탓임을 부각해야
흡연자 돕는 금연정책 병행 필요
전국민 진료비 통계자료 갖고있어
건보공단은 흡연폐해 입증 쉬워
담배유해성·판매위법성 공략을
실제 담배소송은 직접적인 금연 요구나 경제적 부담을 안기지 않으면서도 흡연의 위험성과 담배회사의 실체를 알릴 수 있는 계기라는 평가가 많다. 담배소송은 담배규제정책의 정당성을 마련하는 데도 더 많은 근거를 제공해왔다.
■ 흡연의 폐해 입증할 광범위한 자료 필요해 폐암 등 흡연과 관련 있는 질환은 대부분 그 원인이 한가지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하다. 담배회사들이 즐겨 주장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한 인구집단이 흡연 때문에 입게 되는 피해에 대한 구체적 자료가 필요하다. 미국 주정부가 나선 배경도 여기에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는 흡연 때문에 발생한 각종 질병 치료비를 담배회사에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을 1994년 제정했고, 이는 1997년 미국 대법원의 합헌 판결을 받았다. 미국엔 저소득층의 진료비를 정부가 지원하는 의료보험이 있는데, 이 돈을 주 정부가 제공하므로 담배회사를 상대로 직접 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캐나다도 미국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은 상황이 더 좋다. 건강보험에 거의 모든 국민이 가입해 있어 흡연 관련 질병에 지출되는 건강보험 진료비 통계나 자료를 내놓기가 훨씬 쉽다. 켈리 리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대학 보건과학대 교수는 “다른 나라에 견줘 광범위하고 단일한 건강보험제도를 갖고 있는 한국은 흡연으로 인한 진료비 자료를 객관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폐암이나 심장 및 혈관 질환 등에 더 많이 걸린다는 증거도 실증적으로 구할 수 있어 이를 잘 활용하면 소송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흡연피해소송에서 그동안 한국 재판부는 흡연과 인과관계가 큰 폐암이나 후두암만을 인정했는데, 뇌졸중이나 심근경색과 같은 심장 및 혈관 질환도 여기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스탠턴 글랜츠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폐암이나 후두암이 흡연과 관련성이 크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의 여러 연구 결과로 심장 및 혈관 질환이 흡연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규명됐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런 질병으로 인한 추가 진료비 부담도 담배회사에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담배회사의 위법성 밝혀내야 미국의 흡연피해소송에서 담배회사의 위법성을 밝혀내고 주정부가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데에는 담배회사 내부고발의 힘이 컸다. 미시시피주가 흡연 피해 소송을 제기하자 담배회사를 다니던 전 연구원은 물론 담배회사를 변호하던 로펌 변호사들까지 나서 담배회사들이 니코틴 흡수를 촉진시키고 더 빨리 중독되도록 첨가제를 넣은 사실을 폭로했다. 에릭 리그레즐리 담배소송 전문 변호사는 “주정부가 직접 소송에 나선 덕분에 내부고발자 보호가 크게 강화돼 가능해진 일이다. 담배회사들이 니코틴을 조작하고 중독성을 유발시키는 기만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소송에서 유리해질 수 있다. 다만 담배회사가 거짓 내부고발자를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담배회사 종사자들은 담배의 해악을 알면서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도 내부고발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건보공단은 이미 미국 소송에서 입증된 담배회사의 위법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켈리 리 교수는 “건보공단이 소송을 제기한 담배회사에 필립모리스도 들어있는데 이 회사는 미국 주정부에 의해서도 피소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내겠다고 협의가 이뤄진 만큼 이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벤쿠버/김양중 의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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