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일 한국환경건강연구소장. 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익히지 않은 낙타 고기 섭취를 자제하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 초기 정부가 내놓은 ‘메르스 예방법’은 누리꾼의 냉소를 샀다. ‘하마터면 낙타 고기를 먹을 뻔했다’는 조롱 섞인 반응이 터져나왔다. 단순히 남의 나라 지침을 통째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이 아니다. “한 사회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아 벌어진 ‘위해(危害)소통’ 실패의 단면”이라는 게 전상일(사진) 한국환경건강연구소장의 설명이다.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소통하려 하면 저항이 생기죠.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는 위해소통의 기본원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위해소통 전문가인 전 소장은 26일 낮 <한겨레>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환경보건학 박사인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위해평가연구소(HCRA)에서 3년간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위해소통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위해소통은 위험·위기 상황을 두고 이해당사자 사이에 이뤄지는 소통을 말한다. 이때 전문가는 확률적 평가에 집중하는 반면 일반인은 본능과 경험에 더 많이 기댄다. 둘의 간극이 벌어지면 공포가 커진다. “메르스 사태에서 전문가들은 전염률(기초감염재생산수)이 0.6~0.8이니 안심하라고만 했어요. 그런데 시민들이 궁금한 건 ‘이 병에 걸렸을 때 내가 죽느냐 안 죽느냐’거든요. 시민한테 중요한 건 느낌인데 과학자들은 통계·확률을 이야기해요. 둘 사이의 인식을 좁히는 게 위해소통의 구실이죠.”
5월20일 첫 국내 감염자가 확진을 받은 뒤 40일 남짓 한국 사회는 ‘메르스 공포’로 일상이 마비될 지경이다. 전 소장은 “메르스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위해소통에서는 수용자의 위험 인식과 두려움을 높이는 ‘위험 지각 요인’으로 △위험 통제 주체에 대한 신뢰 △이해관계 △통제 가능성 △역사적 사례 △불확실성 △아이한테 끼치는 영향 등 13가지를 꼽는다. “일단 위험을 다루는 관리자(정부)에 대한 신뢰가 약한 상황이었죠. 그런데다 신종 감염병이어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고 치사율이 40%에 이른다는 국제 보고까지, 메르스 사태는 거의 모든 항목에서 위험 인지 요인을 갖고 있었어요.”
문제는 이런 두려움을 불식해야 할 정부의 소통 능력이 ‘낙제’ 수준이었다는 데 있다. ‘위해소통’은 발생할 위험을 평가하고 준비하는 ‘위험소통’과 이미 발생한 위험에 대응하는 ‘위기소통’으로 나뉜다. 쌍방 합의가 중요한 위험소통과 달리, 메르스처럼 이미 발생한 위험상황의 위기소통에선 대량 사망과 같은 되돌리기 어려운 피해를 막을 효과적인 정보 전달이 중요하다. 정보를 틀어쥔 정부가 얼마나 빨리, 제대로 이를 나누느냐가 사태 수습의 관건이라는 뜻이다.
전 소장은 “위기 대응에선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야 하는데 정부가 최상의 시나리오만 내세운 게 패착”이라고 짚었다. ‘병원 같은 특수한 환경에선 제한적으로 공기 중 감염도 가능하다’는 국제적인 보고가 있었는데도, 보건복지부는 사태 초기부터 줄곧 ‘공기 중 감염은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임기응변식 ‘단언’을 이어간 것도 불신을 키웠다. “시민을 안심시키려면 함부로 확언하지 말라는 건 위해소통의 불문율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언을 했다가 약속을 못 지키면 시민의 불신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5월29일 “개미 한 마리라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자세로 철저하게 대응하겠다”고 했지만 이후 복지부는 몇 차례나 ‘격리 대상자’를 지나쳐 화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 소장은 “결정적으로 병원 공개 요구 앞에서 정부가 비밀주의를 고수해 신뢰와 투명성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까닭에 전 소장은 감염병에 대처하려면 위해소통 전문가를 상시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질병통제예방센터(CDC)나 환경보호청(EPA) 등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정부기관엔 위해소통 전문가를 반드시 한 명 이상씩 두고 있다. “위해소통은 단순히 언론에 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을 안심시키고 위기에서 되도록 조기에 벗어나게 하는 힘입니다.”
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