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 최영숙(왼쪽 둘째)씨와 파독 간호사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사고 하나 없고, 끝나고 나서 쓰레기를 치우는 그런 국민들이 세계 어디에 있겠어요? 우리 국민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솟아났어요. 전 독일 국적을 갖고 있지만, 대한민국을 제대로 세우기 위한 일에 동참하는 게 자랑스럽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파독간호사로 와서 40여년 동안 유럽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한민족유럽연대 최영숙(72) 대표는 지난 11월 한국을 방문해 촛불 집회에 3차례 참여한 감회가 남달랐다.
경북 출신 경찰 공무원의 딸로 자라
1966년 파독땐 투철한 반공의식 무장
독일정부 ‘환송’ 맞서 서명운동 성공
여성모임하며 민주주의자로 변신
지난달 파독 50돌 사진전 ‘귀국’
동료 5명과 3번 촛불집회 동참
“젊은 친구들 함께해 기쁘고 감동”
지난 10일 독일 베를린 쿠담에서 한인동포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시위를 열고 있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역사적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격이었어요.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광장 무대에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어요. 광주항쟁 뒤 시위 때 많이 부르던 노래죠. 나이든 우리들이 이 노래를 따라 부르니까 젊은이들이 ‘인증샷’을 찍더라고요. 정말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고 가슴이 뻐근했어요. 최순실 사건은 창피하고 망신이지만 우리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씨는 서울시에서 주최한 파독 간호사 50돌 기념 사진 전시회 행사에 참석하러 파독 간호사 친구 5명과 함께 고국을 방문했던 차였다. “1966년 독일에 와서 10년간은 무심코 살았죠.” 경북 출신으로 아버지가 경찰이었던 최씨는 그때만 해도 투철한 반공의식으로 무장해 있었다. 하지만 ‘68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베를린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독일 사회 곳곳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에서 획일적인 교육을 받았던 그는 독일의 사회·정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재독여성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독일에서 살고 있는가? 진짜 내가 돈이 없어서 자의로 독일에 오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파독 간호사들이 함께 한국의 정치, 사회에 대해 공부했다. 그럼에도 마음 속 반공의 벽은 두터워 두려움이 몰려왔다. 마침 78년 2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파독 간호사를 본국으로 송환시키려는 독일 정부의 움직임이 있었다.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나가라니 우리가 상품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거리로 나가 서명운동을 시작했죠.”
1만명의 서명을 받아낸 재독여성모임 회원들의 행동은 독일 정부를 움직였다. 5년 이상 일한 간호사에 대해선 무기한 체류허가, 8년 이상 간호사는 무기한 노동허가와 영주권 보장 등의 요구를 관철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뜻을 모아 뭉치면 해낼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고된 독일 간호사 생활이 한국 여성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는 것도 깨쳤다. “한국에서 우리에게 심어준 ‘백의의 천사’라는 허구적 직업의식에서 벗어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한국 여성 노동자와 연대하기 시작했죠. 바자회를 열어 한국 여성 노동운동 자금을 보태는 활동 등 70년대 말에 일어났던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 와이에이치(YH) 노동자들과 연대했어요.”
그리고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독일 제1공영 방송에서 긴급히 프로그램을 바꿔서 광주학살 현장을 보도했다. 80년 5월20일이었다. 그 방송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자기 나라의 젊은이들을 개돼지처럼 죽이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광주항쟁을 독일에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광주’와 연대하면서 그의 단단했던 ‘레드 콤플렉스’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물놀이패를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그것이 씨앗이 되어 지금 독일의 한인 거주 도시엔 풍물패가 있는 곳이 많다.
독일로 돌아온 바로 다음날인 지난 10일 오후 최씨는 베를린 시가지 쿠담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시위에 참가했다. 100여명의 유학생, 교민이 모여 자유 발언과 풍자극, 거리행진을 했다. “피곤해도 이 시위가 있는 곳엔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힘들 텐데 나와서 주권 회복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젊은 친구들이 자랑스럽고 예뻐요.”
베를린/한주연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