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선 설치 중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은 하정원(가명·34)씨. 의수 옆으로 사고 전 즐겨 했던 휴대용 게임기가 보인다. 마지막 관문을 깨기 위해 열심히 아이템도 능력치도 모았지만 게임 속 캐릭터는 몇 년째 멈춰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공간과 그 물건들은 많은 것을 말한다. 그곳에 사는 이의 손길과 시선이 자주 닿은 곳은 어디인지, 세월과 함께 어떤 물건이 그이의 삶에서 비켜났는지…. 공간과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그 공간의 주인을 만나는 또 다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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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원(가명·34)씨의 집 현관문 앞은 아이 셋을 키우는 여느 집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이들이 크는 만큼 짐도 늘어난다. 자전거부터 우산, 장난감까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의 살림살이에서 재잘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집안으로 들어오니 거실과 방 벽면을 가득 채운 가족사진들이 보인다. 사진 찍기는 부부가 함께 한 취미생활이라며 설명하던 그는 각자 다른 브랜드의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하정원씨 집 한쪽에 먼지 쌓인 카메라가 놓여 있다. 사진 찍기는 부부가 함께 했던 취미였다. 백소아 기자
케이티(KT) 자회사인 케이티서비스남부 진주지사에서 인터넷망 수리기사로 일했던 하정원씨는 3년 전 일하다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었다. 전봇대에 오르다가 몇 번 떨어져 본 경험도 있었고, 동료들의 사고도 지켜봤다. 꼬리뼈가 부러지고 하반신이 마비된 동료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고 전에도 안전에 민감했다. “다치면 아이들 못 먹여 살리니까....” 설명하던 정원씨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만 그는 2019년 1월 9일 사고를 피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고객들의 독촉 전화가 쏟아졌던 날이었다. 급하다며 통사정하는 고객이 수리를 요청한 현장 주변에는 고압선과 통신선이 함께 걸린 전봇대가 많아 감전 위험이 컸다. 그래서 그 지역에 통신선만 거는 통신주를 세워달라 회사에 요구하기도 했던 곳이었다.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위험은 여전했지만 현장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작업 전 안전거리 이내 위험 전압을 감지해 알려주는 활선 경보기도 테스트했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불량이었다고 나중에 회사는 알려줬다. 그 모든 일이 겹치고 겹쳐 그의 삶을 뒤바꿀 사고가 일어났다. 멀리에서 보면 불운한 우연의 결과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바꿀 수 있었으되 조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다수 보였다. 일하는 이의 안전을 먼저 고려했더라면 반드시 조치해야 했을 일들.
신발장 속에 있던 정원씨의 축구화를 현관에 꺼내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신었던 때가 3년 전이라며 정원씨는 멋쩍게 웃었다. 백소아 기자
그 사고로 정원씨의 몸과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그의 집안에는 그날에 멈춰진 하정원씨의 시간들이 숨어 있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담던 카메라에는 어깨 끈이 돌돌 말려 있었고, 사용한 지 오래된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사고 전 정원씨는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해 휴대용 게임기를 즐겨 했지만, 이제는 아이들의 차지가 됐다. 게임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자신의 게임 캐릭터에 모든 준비를 마친 그 시점에 정원씨는 사고를 당했다. 게임의 ‘끝판왕’은 결국 깨지 못했다. 신발장 안 수북한 아이들의 신발 사이에는 정원씨의 연두색 축구화도 숨어 있다. 동료들과 종종 축구를 즐겨 했지만 사고 이후 축구화를 신지 않았다.
아내를 태우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선 하정원씨가 자신의 의수에 맞춰 개조한 차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응 거기에서 기다리면 돼.”
인터뷰 끝자락, 아이와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정원씨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가족과 함께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고 돌아온 일상에서 사고 전처럼 온전하게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달을 때마다 화가 쌓였고, 때로 좌절이 너무 고통스러워 무위를 택하기도 했었노라 그의 마음을 들려준 뒤였다. “죽고 싶은 현실”을 딛고 다시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그가 저 다정함에 이르기까지 어떤 고통과 의지를 쥐어짰을까 차마 헤아려지지 않았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 사진기사는 2030 청년 187명의 산재 기록을 톺아본 <한겨레> 기획보도 ‘살아남은 김용균들’ 중 하나로,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더 많은 기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bit.ly/3AIbW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