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21돌 특집] 네덜란드 ‘일자리 나누기’ 현장을 가다
임금·복지 등 전일제근로자와 동등한 정규직
근로시간 줄여 고용 확대…생산성도 높아져
임금·복지 등 전일제근로자와 동등한 정규직
근로시간 줄여 고용 확대…생산성도 높아져
“틸버그대학의 본부직원 중 절반은 주 3~4일만 일하는 시간제근로자(파트타이머) 입니다.”
네덜란드 남부 틸버그대학 기획운영부에 근무하는 클레멘타인 리히텐버그(40·여)는 지난 6일 깜짝 놀라는 기자를 향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주당 34시간만 일하는 파트타이머다. 그 중 2시간은 집에서 일한다. 은행에 다니는 남편은 주당 28시간만 근무한다. 유럽에서 네번째로 큰 물류회사인 지오디스(GEODIS)의 네덜란드 로테르담지점은 아예 인사책임자가 파트타이머다. 엘스리나 반 노르트(24·여)는 “주 5일과 4일 근무를 번갈아 하며, 주당 36시간을 일한다”며 “유능한 인재를 쓰려면 파트타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는 파트타이머들이 많다. 대학·공공기관은 물론 일반기업이나 식당·호텔·가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일한다. 근무시간은 주 5일 대신 3~4일만 근무하는 게 일반적이다. 네덜란드 전체 근로자 중에서 주당 30시간 이하로 일하는 파트타이머의 비중은 40%에 육박한다. 우리나라의 5배에 달하는 것은 물론 선진국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의 두배를 넘는다. 주 30시간 이상 일하는 파트타이머까지 합치면 차이는 더 커진다.
파트타이머라고 하면 흔히 비정규직인 아르바이트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파트타이머는 엄연한 정규직이다. 시간당 임금과 상여금·휴가·복지·교육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전일제 근무자(풀타이머)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시간제 근무 여부는 대부분 근로자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이뤄진다. 틸버그대학의 클레멘타인 부부는 자녀들의 양육 때문에 원한 경우다. 그는 “우리 부부는 세 아이들을 가급적 보육시설에 맡기지 않고 직접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간제 근무는 이처럼 네덜란드의 가족중심문화와 잘맞아 떨어진다. 네덜란드 여성근로자의 70% 이상이 파트타이머로 일한다. 지오디스의 엘스리나는 자유시간을 갖기 위해 파트타이머를 택한 경우다. 외국계은행 암스텔담지점에서 5년째 일하는 교포 조여주(33·여)씨도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입사 1년 뒤에 바로 파트타이머로 전환했다.
네덜란드에서 시간제 근로가 활성화한 것은 1982년 노동자·사용자·정부 3자가 바세나르협약을 체결한 이후다. 경제가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실업률이 치솟자 노동자는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대신 정부와 사용자는 근로시간 단축과 시간제 근로의 활성화를 통해 고용안정 노력을 펴기로 노사정이 합의했다. 근로시간을 줄여서 두세명이 하던 것을 서너명이 나눠서 일하되, 근로시간이 짧은 파트타이머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고용창출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일종의 근로시간 단축형 워크셰어링(일자리 나누기)인 셈이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2%를 넘던 실업률과 20%에 육박하던 청년실업률이 각각 절반선으로 낮아졌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두자리수에 이르던 임금상승률은 5% 밑으로 떨어졌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성재 박사는 “바세나르협약 이후 96년까지 약 12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는데, 파트타임 일자리만 76만5천개(60%)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정부가 90년대 중반 이후 파트타이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1년 이상 일한 근로자가 파트타이머로 전환을 원하면 회사운영에 특별한 지장이 없는 한 받아주도록 의무화한 것도 기폭제가 됐다.
네덜란드식 일자리나누기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 기업 경쟁력도 함께 높였다. 지오디스 네덜란드법인의 벤 오벤디지크 이사는 “근로자가 주 5일 근무를 4일로 전환할 경우 근로시간은 줄지만 일의 양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서, 회사는 같은 임금으로 더 많은 일을 시키는 셈이고, 근로자들도 짧은 시간에 일을 더 집중해서 한다”며 “회사 전체로 15~20%의 생산성 증대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시간제 근로는 전일제 근로에 비해 책임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상식을 뒤집는 얘기다. 연장근로에 대한 초과수당 부담이 없는 것도 기업엔 유리하다. 틸버그대학 사회학과의 정희정 선임연구원은 “결혼 뒤 집에서 놀고있는 고숙련·고학력의 여성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시장으로 재진입하면서 사회 전반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네덜란드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이 1400시간 이하로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짧은 편에 속하면서도 시간당 생산성은 세계 최고 수준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이 2400시간으로 세계 최장 수준이면서, 시간당 생산성은 꼴찌인 것과 대조적이다.
세계 6~7위의 무역대국인 네덜란드도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2.8%였던 실업률이 올해는 3.9%로 높아지고 경제성장률은 2.1%에서 -3.5%로 뚝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는 인근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양호한 수준으로, 유럽연합 안에서도 가장 탄탄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실업률의 경우 가장 높은 스페인의 17.3%에 비해 4분의 1 수준이고, 유럽 평균치에 비해서도 절반 이하다. 코트라 암스테르담 무역관의 윤재천 관장은 “상황이 이전보다 안 좋지만, 다른 나라들처럼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틸버그대학 사회학과의 톤 윌트하겐 교수는 “네덜란드식 일자리나누기는 위기 극복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한 고용 확대로 가계수입이 늘면서 이것이 다시 소비를 증가시키고 성장률을 높이는 선순환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인구와 국토가 작고 자원도 없는 네덜란드가 유럽 전체 물동량의 40%를 점하는 ‘강소국’으로 발돋음하는 데도 원동력이 됐다.
‘실업자 100만명 시대’ 진입을 눈앞에 둔 한국이 고용난을 근본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식 일자리나누기 모델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네덜란드모델은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면서 기업과 경제 전체의 경쟁력도 높이는 ‘1석 3조’의 해법이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임금삭감형 고용유지와, 공공근로·인턴 위주의 일자리 창출은 땜질식 처방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김영호 유한대 총장은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시간제 근무를 활용한 네덜란드모델이 가장 적합한 일자리나누기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이명박 정부도 기획재정부와 노동부 합동으로 다음달 중순 네덜란드로 조사팀을 보내기로 했다. 관건은 네덜란드 사례가 보여주듯이 성공적인 일자리나누기를 위해서는 노사간 양보와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노사정은 바세나르협약 이후에도 93년 신노선 협약, 98년 고용 유연성 및 안정법 도입, 2004년 가을협약,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한 2008년 10월 협약 등을 잇따라 성사시키며 저성장·고실업률로 상징되는 ‘네덜란드 병’을 ‘네덜란드 기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한국은 안정적 노사관계에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네덜란드와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해 위기극복을 위한 사회적협약을 추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현 경북대 교수)은 “네덜란드모델을 배워야 한다”고 제안했다가, 재계와 보수언론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았다. 이 교수는 “경제위기를 돌파하려면 네덜란드처럼 노사대타협이 필요한 상황은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노사 대타협을 위해서는 먼저 노사로부터 신뢰받은 정부가 필요하고, 다음으로 경영계가 먼저 양보해서, 노조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노동재단의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한국의 노사정 합의가 어려운 것은 기득권 세력이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한국의 재벌이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암스테르담·로테르담·헤이그·틸버그(네덜란드)/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실업자 100만명 시대’ 진입을 눈앞에 둔 한국이 고용난을 근본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식 일자리나누기 모델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네덜란드모델은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면서 기업과 경제 전체의 경쟁력도 높이는 ‘1석 3조’의 해법이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임금삭감형 고용유지와, 공공근로·인턴 위주의 일자리 창출은 땜질식 처방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김영호 유한대 총장은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시간제 근무를 활용한 네덜란드모델이 가장 적합한 일자리나누기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이명박 정부도 기획재정부와 노동부 합동으로 다음달 중순 네덜란드로 조사팀을 보내기로 했다. 관건은 네덜란드 사례가 보여주듯이 성공적인 일자리나누기를 위해서는 노사간 양보와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노사정은 바세나르협약 이후에도 93년 신노선 협약, 98년 고용 유연성 및 안정법 도입, 2004년 가을협약,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한 2008년 10월 협약 등을 잇따라 성사시키며 저성장·고실업률로 상징되는 ‘네덜란드 병’을 ‘네덜란드 기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한국은 안정적 노사관계에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네덜란드와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해 위기극복을 위한 사회적협약을 추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현 경북대 교수)은 “네덜란드모델을 배워야 한다”고 제안했다가, 재계와 보수언론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았다. 이 교수는 “경제위기를 돌파하려면 네덜란드처럼 노사대타협이 필요한 상황은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노사 대타협을 위해서는 먼저 노사로부터 신뢰받은 정부가 필요하고, 다음으로 경영계가 먼저 양보해서, 노조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노동재단의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한국의 노사정 합의가 어려운 것은 기득권 세력이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한국의 재벌이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암스테르담·로테르담·헤이그·틸버그(네덜란드)/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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