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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허술한 증거·빡빡한 기준…직업성 암 판정 ‘시대착오’

등록 2012-05-01 08:20수정 2014-03-02 22:21

암도 산재다

‘작업환경측정’ 하나마나
조사 날짜 미리 통보해
당일에는 작업장 ‘깨끗’
발병까지 잠복기 긴데도
보관기간은 달랑 3~5년
자동차 회사에 다녔던 김만수(가명·48)씨는 지난해 3월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숨졌다. 김씨는 숨진 지 4개월 만에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남은 가족에게는 유족연금 등이 나와 그나마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암 산재 인정을 김씨는 어떻게 받을 수 있었을까? 산재를 입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증거물’은 작업환경측정조사와 물질안전보건자료(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유해물질 이름과 성분), 건강검진자료다. 김씨는 1988년 자동차 회사에 입사해 21년7개월 동안 도장부서에서 일했다. 도장 공정은 차 표면에 색상을 입히는 작업을 말한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받은 김씨의 ‘업무상 질병 판정서’를 보면, 작업환경측정 자료가 산재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김씨가 일했던 공정의 과거 작업환경측정 자료에는 발암물질인 벤젠이 1ppm 이상 검출된 것으로 적혀 있다. 특수건강검진도 산재를 인정받는 데 도움을 줬다. 김씨는 건강검진에서 자각증상 설문항목에 구토, 현기증, 건망증, 집중력 저하 등을 체크하기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작업환경측정 기록상 벤젠이 상당량 측정됐고, 벤젠과 백혈병의 연관성은 확립돼 있으므로 업무 관련성이 높다”며 산재로 인정했다.

‘인정기준’도 현실성 없어
49년째 7개 기준 그대로
“업종·직종별로 개선 필요”

김씨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증거물’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어 산재의 벽을 넘기 힘들다. 우선 작업환경측정은 조사나 관리가 부실한 편이다. 문길주 전 전국금속노조 노동안전실장은 “작업환경측정은 비용을 기업이 내고 전문기관에서 날짜를 정해놓고 조사를 하러 오는데, 기업들은 설비 가동을 줄이거나 작업장을 깨끗하게 치우기 때문에 유해요인을 제대로 평가할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다. 실제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대한산업보건협회를 감사한 결과, 노동자들에 대한 작업환경측정 등을 부실하게 진행하고 결과마저 조작·은폐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협회는 전국 산업안전보건업무의 50%가량을 대행하고 있다. 작업환경측정조사 자료가 남아 있더라도 내용이 엉망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아예 작업환경측정조사 결과를 볼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보존 기간이 정부는 3년, 회사는 5년으로 짧은 탓이다. 암은 발병하기까지 잠복기가 길어 오래전 자료가 필요한데도, 제도가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사업장을 자주 옮기는 비정규직에게는 치명적이다. 16년 동안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했던 이성민(가명·60)씨는 2010년 폐암을 진단받아 산재 신청을 했으나, 작업환경측정이나 건강검진 자료가 거의 없어 결국 불승인됐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는 “지금의 조건에선 대부분의 산재 피해자들이 ‘증거물’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근로복지공단이나 사용자가 노동자의 재해가 ‘업무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산재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직업성 암 인정 기준이 지나치게 협소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은 검댕·타르 등 석유화학물질에 의한 피부암, 벤젠에 의한 조혈기계암 등 7가지에 대해서만 직업성 암을 인정하고 있다. 이 기준은 1963년 산재보험법이 만들어진 뒤 49년 동안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김인아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7가지 기준은 직업성 암 인정 기준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할 정도로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대폭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을 적극 받아들여 직업성 암에 대해 20가지 인정 기준을 마련했다. 이현주 우송대 교수(간호학)는 “일본이나 독일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직업병 목록을 계속해서 확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반면 우리는 30년 전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했다.

업종과 직종의 특성을 반영한 직업성 암 인정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인아 교수는 “동일한 직무를 맡은 근로자들은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각종 직업요인(유해인자, 노동조건, 사회경제적 여건 등)의 특성이 비슷한 만큼, 산재를 판단할 때 업종과 직종의 특성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직업성 암 인정 기준이 부실하다는 것은 고용부도 인정하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전문가들이 모여 직업성 암 인정 기준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며 “노사 의견을 수렴해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기준 (자료: 고용노동부)

1. 검댕·타르·아스팔트 등으로 인한 상피암

2. 염화비닐에 노출된 업무에 4년 이상 일한 노동자의 간혈관육종

3. 타르에 노출되는 업무에 10년 이상 일한 노동자의 폐암이나 피부암

4. 크롬 또는 그 화합물에 노출되는 업무에 2년 이상 일한 노동자의 폐암이나 비강·부비강·후두암

5. 벤젠 1ppm 이상의 농도에서 10년 이상 일한 노동자의 백혈병, 골수형성 이상 증후군, 다발성 골수종, 재생불량성 빈혈

6. 석면에 노출되는 업무에서 일한 노동자의 폐암

7. 유해물질 노출·중독 등으로 기존의 간질환이 악화되거나 바이러스성 간질환을 지닌 노동자가 업무와 관련해 간암이 발생하거나 악화된 경우


작업환경측정이란?

산업안전보건법 규정에 따라 작업할 때 발생하는 유해인자에 노동자가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측정·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화화물질, 중금속, 소음, 분진, 고열, 금속가공유 등 측정 대상 유해인자 190종에 노출되고 있는 노동자가 1명 이상 일하고 있는 사업장은 6개월에 1번 이상 실시해야 하고, 결과는 고용노동부에 보고해야 한다.


<관련기사>

암 발생 한해 17만명…산재판정은 25명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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