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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인천 피난민들 천막촌 ‘나의 제2의 고향’ / 이총각

등록 2013-05-19 19:46

1951년 1·4후퇴 때 네살 난 이총각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황해도 연백에서 구사일생으로 피난 내려와 인천 화수동 천막촌에 정착한 이래 계속 주변 빈민가에서 살고 있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산비탈에 자리한 피난민들의 천막촌 풍경으로, 지역은 확인되지 않았다. 참전 미군이 찍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1년 1·4후퇴 때 네살 난 이총각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황해도 연백에서 구사일생으로 피난 내려와 인천 화수동 천막촌에 정착한 이래 계속 주변 빈민가에서 살고 있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산비탈에 자리한 피난민들의 천막촌 풍경으로, 지역은 확인되지 않았다. 참전 미군이 찍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2
이총각은 1947년 황해도 연백에서 1남6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은 어머니 유순덕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의 삶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이남으로 내려오던 날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구순의 노모는 끔찍하게 오금이 저렸던 그날의 공포를 요즘도 생생히 떠올리시곤 한다.

“그때가 1·4 후퇴 때이니 겨울도 아주 한창때 아니냐? 네 큰언니 손을 잡고 어린 너는 등에 업고 시커먼 밤에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을 건너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어. 그러더니 옆에서 사람들이 총탄에 맞아 푹푹 쓰러지는 거야. 뭐, 그냥 죽어라고 뛰었지. 뭐가 뭔지 모르고 앞뒤 분간 없이 도망을 친 거지. 그러고는 한숨을 돌리는데 네가 등에 딱 붙어 있더라고. 그때야 널 업고 있었던 게 생각나지 뭐냐.”

셋째까지 딸이어서 실망한 어머니가 젖도 물리지 않은 채 윗목에 팽개쳐두는 바람에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던 그였다. 그때 산후조리(산간)을 해주러 왔던 외할머니도 다음엔 아들을 낳으라고 ‘총각’이라 이름짓고는 휑하니 가버렸을 정도로 섭섭해했단다. 다행히 밑으로 남동생을 봤으니 이름 덕을 본 셈이다. 어머니에게는 줄줄이 딸을 낳아 시가 식구로부터 구박을 당했던 게, 남편이 노름에 빠져 속을 썩인 것보다 더 아픈 상처였다. 부모를 일찍 여읜 아버지 이창일은 서당에서 공부도 많이 했지만 일복이 없었던지 돈벌이보다 무직으로 보낸 세월이 더 길었다. 그나마 큰댁이 잘살아서 어머니가 더부살이하다시피 해서 자식들 배를 채워야 했는데, 그 시절 큰어머니에게 무시당했던 기억을 두고두고 속상해했다. 열여덟 나이에 얼굴도 모른 채 시집을 와 처음 본 남편은 ‘매코롬하니’(말끔하니) 잘생겼지만 어쩐지 정이 안 가더란다. 아마도 평생 ‘백수건달’로 살면서 마누라가 애써 농사지어 놓은 가을걷이를 밭떼기로 팔아치우고 노름에 빠져 살 낌새가 보였던가 보다.

전쟁 와중에 밤을 틈타 남쪽으로 피난해야 했던 그날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뒤늦게 따로 출발했고 어머니 홀로 두 딸을 데리고 사선을 넘어야 했다. 북쪽에 남은 외할머니는 당신 살림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고생에 받쳐 사는 딸이 안타까워 둘째를 맡아 키워주겠다며 자꾸 뒤돌아보는 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헤어져 북에 남은 둘째 언니는 지금껏 살아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에도 번번이 떨어진 까닭에 어머니는 당신 생전에 둘째 딸 얼굴이나마 한번 볼 수 있겠느냐며 그저 한숨이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엔 아예 상봉의 길이 막혀 허송세월을 했으니…. 이모들도 모두 북쪽에 있어서 어머니의 외로움은 더했다.

그 겨울 엄마 등에 붙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총각은 그때부터 인천 사람이 되었다. 허름한 입성에 겨우 몸만 성히 내려온 네 식구가 남루한 봇짐을 풀어놓은 곳은 바닷가에서 가까운 인천 화수동이었다. 그곳은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이에서 살려는 이북 피난민들로 북새통이었다. 누가 쳐놨는지 모르는 천막들이 즐비했고, 총각네처럼 막 내려온 사람들은 부두에서 가까운 세관창고에서 지내야 했다. 널따란 창고 안에는 너나없이 기진맥진한 피난민들이 한가득이었다. 9살이었던 큰언니는 그 와중에도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본 기억도 있다. 한 달쯤 지나 천막을 구해 나오면서 가족들은 조금씩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당시 인천에는 20만명에 가까운 피난민들이 내려와 화수동을 비롯해 만석동 일대에 천막촌을 이룬 채, 전쟁이 끝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으며 하루살이와 같은 힘든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천막집에 취사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고, 그나마 공동화장실도 모자라 아이들은 그냥 길섶에서 볼일을 봤다.

인천에서도 가장 빈민지역으로 괭이부리말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60~70년대 충청도·전라도에서 가난을 등에 지고 올라와 서울로 가는 사람들의 중간기착지가 되기도 했다. 사소한 일로 아귀다툼이 끊이지 않았지만 떡 한조각이라도 나눠 먹을 줄 아는 인정이 넘쳤다. 어린 총각은 척박하지만 새로운 삶을 일궈나갈 희망도 넘쳤던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자랐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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