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교육 투쟁 2000일
조합원, 27m 종탑서 농성 126일
회사와 오랜 법정다툼으로 지쳐
정부 ‘여성 일자리 창출’ 정책에
10만여 학습지 노동자는 소외돼
“노동법 개정 없이 땜질식 처방”
조합원, 27m 종탑서 농성 126일
회사와 오랜 법정다툼으로 지쳐
정부 ‘여성 일자리 창출’ 정책에
10만여 학습지 노동자는 소외돼
“노동법 개정 없이 땜질식 처방”
“시원한 냉면 생각이 간절하네요.”
단체협약 체결 등을 내걸고 시작한 투쟁이 11일로 2000일째, 서울 혜화동성당 종탑농성만 126일째를 맞는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재능교육지부(재능지부) 여민희(40) 조합원의 전화선 너머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이날 서울의 낮기온은 최고 32도까지 올랐다. 함께 생활하는 오수영(39) 조합원도 하루하루 지쳐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요즘 하루에 한 끼 먹어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먹어도 소화가 안 돼요. 생리현상이 자주 발생해서 더 안 먹게 돼요.” 불면증까지 더해져 항상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운다. “저도 사람인데, 팥빙수·아이스크림·냉면 같은 음식들 생각나죠. 샤워도 하고 싶고요.”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들은 노동자를 떠나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다.
투쟁 2000일을 맞았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노조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한 만큼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단체협약을 먼저 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회사는 해고자 신분에서 단체협약 체결은 불가능하니 복직을 먼저 하라고 맞서고 있다. 노동자들은 회사 쪽 제안이 농성을 서둘러 멈추게 하려는 명분에 불과하다고 본다. 또 단체협약 체결 전에 덜컥 복직했다가 또다른 탄압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유명자 전 재능지부장은 “단체협약을 먼저 체결 안 하겠다는 것 자체가 노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쪽과의 지리한 협상만큼이나 이들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약자에게 더 냉엄한 한국의 노동환경이다. 재능지부의 투쟁은 특수고용직과 여성이라는, 한국 노동현장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한 두 계층의 문제가 겹쳐 있다.
우선 학습지교사와 같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자’가 아니다. 그나마 지난해 11월 서울행정법원이 “학습지 노조는 정식 노동조합”이라고 판결해 ‘노조법상의 노동자’ 지위는 인정받았다. 회사는 항소했다. 노조는 결국 대법원까지 갈 것이라고 본다. 이들의 소송도 9급심이라는 사상 초유의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현대차 해고자 최병승씨 사례의 도돌이표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한겨레> 4월19일치 10면)
이들은 여성노동 정책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고용률 70%를 목표로 내건 정부는 지난달 여성 친화적 일자리 25만개를 만들어 2012년 53.5%인 여성취업률을 2017년까지 61.9%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90% 이상이 여성인 전국 10만여 학습지 노동자들은 여전히 정부 셈법상 노동자가 아니고 고용률 통계에서도 빠지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다. 유득규 재능지부 집행위원장은 “학습지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다른 가정의 아이를 돌봐주는 일이기 때문에 정부가 말하는 일·가정 양립을 위해서도 절실한 일자리다. 하지만 정부는 계속해서 학습지교사의 노동자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송은정 노동정책부장은 “여성 노동을 육아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부업 정도로 생각하는 정부의 인식이 재능지부 사태의 해결을 더디게 하고 있다. 여성 노동의 근본적 인식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야 할 정부가 시간제 일자리 같은 땜질식 처방만 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창조적 일자리’의 사례로 ‘사설탐정 양성화’ 등을 제시할 때, 누군가는 종탑에 올라 힘겹게 생리현상을 해결하며 노동자성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둘 사이의 간극은 종탑과 지상의 거리 27m보다 훨씬 멀어 보인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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