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7월22일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앞줄 맨 왼쪽 한복 차림)의 구속 사태는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물론 이총각을 비롯한 전체 노조 활동가들의 투쟁 의지를 고조시켰다. 사진은 76년 4월 청계피복 노조의 노동교실 개소식 모습. 이소선은 당시 노동교실 실장을 맡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2
1977년 7월22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이 경찰에 연행되어 바로 서울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마침 집에서 씻고 있었던 그는 여간첩을 잡으러 왔다고 고함을 지르며 들어오는 경찰 50명에 의해 속옷 바람으로 끌려갔다. 이소선의 구속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활동가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바로 며칠 전 청계노조를 돕다 구속된 장기표를 함께 면회했던 그 어머니가 구속되었다니 이총각은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이총각이 처음으로 이소선을 만난 건, 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관 2층에서 시작된 목요기도회에서였다. 이소선은 자그마한 체구에 야무진 모습으로 아들의 죽음을 겪은 심정과 그 이후 당한 협박과 매수 시도, 청계노조 탄압 등의 진상을 폭로했다. 총각은 어떻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게다가 나이도 드신 분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투쟁의 선두에서 싸울 수 있는지 마음 깊이 감동을 느꼈다. 그날 동일방직 노조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이소선은 총각을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특별히 많은 관심을 쏟아주었다. 이후 이소선은 동일방직 투쟁이 있을 때마다 청계 조합원들과 함께 달려와 큰 힘을 주었다.
당시 청계피복노조는 공식, 비공식으로 여러 봉제업체의 노조 결성을 돕고 근로조건 개선이나 임금협상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만큼 청계노조는 물러서지 않는 투쟁으로 다른 노조들한테 선도적인 활동을 해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이소선이 투쟁의 선두에 서서 몸싸움을 벌이며 나부터 잡아가라고 소리치고 버티는 통에 경찰들이 난감해 물러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명 조합원들의 힘을 다 합친 것만큼이나 위력이 있었다.
76년 4월 청계노조의 새 집행부가 구성되면서 이소선은 노동교실 실장을 맡았다. 그가 노동교실에 상주하자 건물 안팎이 활기로 가득 찼다. 누구든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머니의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소선은 대중연설을 따로 배운 적이 없었는데도 듣는 사람의 마음에 그대로 와 닿는 뛰어난 연설로 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곤 했다. 게다가 기억력이 뛰어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모두를 기억하고 친근하게 대해주므로 노동교실을 처음 찾아온 노동자들도 금방 한 가족처럼 친해졌다.
노동교실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다른 공장 노동자들이 청계노조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직업훈련도 했고 노동법과 정치·경제·지도력 훈련 등 다양한 과정을 진행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노동교실이 노동자들을 대학생이나 교회 집단들과 연결시키는 통로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소선의 구속 사유는 장기표의 재판장에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당장 청계노조의 석방투쟁이 시작되었다. 연행되자마자 구치소에 수감된 어머니는 가족 이외 누구도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한꺼번에 몰려가 면회를 거절당한 조합원들은 성동구치소 담장 밖으로 가서 여자 사동을 향해 힘껏 소리를 쳤다.
“하나, 둘, 셋, 이소선 어머니 내놔라!” “하나, 둘, 셋, 어머니 건강하세요!”
밖에서 소리 지르는 조합원도, 안에서 소리를 들은 이소선도 목이 메어 더 이상 외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구속과 함께 노동교실을 폐쇄당한 청계노조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9월9일, 청계 조합원들은 노동교실을 폐쇄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인 끝에 문을 뚫고 들어가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나중에 목숨을 걸고 옆 건물에서 뛰어들어온 사람까지 모두 53명이었다. 순식간에 건물 주위가 봉쇄되었다. 이후 투신·할복·동맥절단 등 8시간에 걸친 처절한 저항을 계속했지만 경찰은 물러나지 않았다. 마침내 흥분한 노동자들이 “들어오면 다 같이 타서 죽자”며 신문지에 불을 붙였다. 방 안이 연기로 가득 차게 되자, 그제야 당황한 경찰은 물러갔다. 농성자들은 상처가 깊은 조합원들 치료로 다급한데다, 이소선 어머니를 데리러 갔다는 경찰의 말을 믿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몽둥이와 몰매였다. 이 사태로 신광용·김주삼·이숙희·신순애·임미경 등 5명이 구속되었고, 이소선은 끝내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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