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저녁 6시30분께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앞에서 쌍용차 사태 해결을 요구하는 ‘매일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의 하루
쌍용차 희생자 24명 영정 있었던
분향소는 4월4일 중구청 철거 뒤
거대한 화단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 옆에 1평 남짓한
임시분향소를 다시 세웠다 경찰과 중구청의 철거 요구에도
천주교 미사 덕에 버티는 분향소
“협소하게나마 지킬 수 있던 건
연대하는 이들이 자릴 지킨 덕분”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인도에는 거대한 화단이 있다. 가로 20m, 세로 2.5m쯤 되는 이 화단에는 덕수궁 담장보다 2배가량 높은 나무가 대여섯 그루 있고, 수풀이 무성했다. 군데군데 꽃들도 무심하게 피었다. 이 화단은 경찰의 특별관리대상이다. 이 화단을 지키는 데 투입된 경찰력만 20명 남짓으로 화단 앞에 15명, 인근 보도와 대한문 앞 광장에 5명 정도가 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무명의 근무인원은 하루 24시간 유지된다. 대한문 앞 대로변에 세워진 경찰버스 두 대에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교대근무하는 경찰이 나온다. 이 버스는 온종일 시동을 켜놓고 도로변에 매연을 뿜고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곳 화단 옆 대한문 앞에는 1평 남짓한 공간에 쌍용차 희생자 24명의 영정을 모신 분향소가 있다. 서울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8월18일 정오, 이 분향소를 지키던 김수경(51) 쌍용차 정리해고자는 화단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게 코미디지. 화단이 뭐라고 지들이 만들고서 지키고 있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일이여.” 김씨는 이 분향소가 임시로 세워진 간이시설물이라고 했다. 지난 4월4일 쌍용차 농성장과 분향소가 경찰과 중구청 공무원들에 의해 철거되고서 만든 임시분향소라는 설명이었다. 대한문 앞 횡단보도에서는 시민단체에서 근무하는 이대근(36)씨가 1인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쌍용차 국정조사를 실시하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방금 지나친 한 아저씨가 저를 보고서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쌍용차 사태에 대해 설명하더군요. 더운 날이라 서 있기도 힘들지만, 나름 보람 있어요.” 간이분향소 맞은편 대로변과 가까운 인도에서는 심영철씨가 8월24일에 있을 쌍용차 범국민대회를 홍보하고 있었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 4시에 서울역 광장에서 쌍용차 범국민대회를 개최합니다.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국정조사를 실시하기 위해 시민 여러분이 힘을 보태주세요.”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심씨는 틈날 때마다 대한문 앞을 찾아 자원봉사를 한다고 했다. 이날 홍보도 자원봉사차 하는 일이었다. 심씨의 뒤편엔 경찰버스 3대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그는 “안 그래도 날씨가 더운데 경찰차가 24시간 시동을 켠 채로 에어컨을 가동해 주변에 열기를 뿜어대고 있다. 시민들이 쌍용차 분향소를 보지 못하도록 이곳에 경찰버스를 세워놓은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성영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답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튿날인 19일 오후 6시, 매일미사를 준비하는 대한문 앞 광장을 다시 찾았다. 평택 쌍용차 공장 앞 송전탑 위에서 농성을 하던 문기주 쌍용차지부 정비지회장이 미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그는 대한문 앞이 갖는 공간적 상징성을 강조했다. “이곳 분향소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요. 부당한 탄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연대하죠. 이제 대한문 앞은 현대판 ‘신문고’와 같은 곳이 됐어요. 이제 더 이상 쌍용차만의 공간도 아닌 셈이죠.” 문 지회장은 임시분향소가 자리잡은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농성장과 분향소가 4월4일 철거된 이후 분향소만은 살려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임시분향소를 바로 설치했지만, 경찰과 중구청은 지속적으로 철거하려 했죠. 6월10일 김정우 지부장이 연행된 그날엔 저도 다쳤습니다. 경찰 100여명과 중구청 공무원 수십명이 몰려들어 밀어붙였죠. 여긴 집회신고를 한 곳인데도 끊임없이 침탈하려고 해요. 그나마 천주교 사제분들이 매일미사를 한 덕분에 이 분향소가 유지되고 있다고 봐요.” “이것밖에 못 넣어서 미안합니다” 저녁 6시 반, 미사가 시작됐다. 성가곡이 울려퍼지고, 정의구현사제단의 나승구 대표신부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시대가 ‘더 빨리, 더 빨리’를 추구할수록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외로움, 불안감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중요한 것을 찾고,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실천하게 하소서.” 미사에는 60명이 넘게 참석했다. 직장인 송오영(43)씨는 “회사가 이 근처라서 일주일에 2~3번씩 미사에 참석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신부님이 대신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천에서 온 주부 김옥이(51)씨는 “쌍용차 사태에 대해 잘 몰랐는데 최근 성당 신부님이 알려주셔서 매일미사에 와봤다. 남편이 남동공단에서 일하고, 큰아들이 목공 일을 하는데 쌍용차 사태가 남 일 같지 않다”고 밝혔다. 미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고 전태일 열사와 2살 터울의 남동생 전태삼(63)씨는 “미사 시간에 맞춰서 매일 온다. 협소하게나마 분향소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연대하는 이들이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뒤편에서 미사를 지켜보던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기독교 신자라 미사 형식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산책하러 나온 김에 미사에 들렀다”고 말했다. 미사가 끝나고서 만난 길음동성당(미아리성당)의 이순덕(75) 수녀는 “궁지에 내몰린 사람들의 처지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되도록 자주 찾으려 한다”고 말하고서 난간을 붙잡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미사는 40분가량 진행됐다. 대한문 앞에서 매일미사가 시작된 시기는 분향소가 철거되고 며칠 뒤인 올해 4월8일이었다. 나승구 신부는 “올해 초 24번째 희생자가 나온 이후 이곳 대한문 앞에서 종종 미사를 진행했고, 4월4일 분향소가 철거된 이후엔 매일미사를 꾸리고 있다”고 말했다. 매일미사는 천주교 교단에서 자발적인 참여로 유지되고 있었다. 수원교구, 인천교구 등 각 교구에서 하고 싶은 날짜에 신청하는 식으로 유지된다고 나 신부가 밝혔다. 그는 “신기하게도 누구에게 미사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는데도 지금까진 자발적인 참여만으로 미사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문 앞은 2009년부터 시민들의 추모와 참여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서 시민분향소가 차려졌고, 용산참사 희생자 분향소가 이어서 만들어졌다. 본격적으로 연대의 공간이 된 시기는 지난해 4월 쌍용차 분향소가 설치되면서다. 이창근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은 “처음엔 영정사진이 맨땅에 짓밟히고, 경찰과 충돌한 노조원들이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결국 대한문을 중심으로 연대가 확장됐고, 유대가 강화됐다”고 밝혔다. 이 분향소가 남대문경찰서, 중구청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면서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 강정마을회 등에서 연대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함께살자 농성촌’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올 3월 방화사건으로 농성장이 불탔고, 경찰과 중구청의 철거 시도가 거듭됐다. 4월엔 경찰 300명과 중구청 직원 50명이 투입돼 농성장을 철거했다. 미사가 끝나고 대한문 앞에 어둠이 깔렸다. 쌍용차 범국민대책위는 매일 밤 2명씩 당직을 서며 분향소를 지켰다. 이날 당번은 쌍용차지부의 김수경·한윤수 조합원이었다. 밤 11시가 넘자 분향소 앞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시민들은 밤이 늦어도 간간이 분향소에 들러 헌화를 했다. 한 청년은 모금함에 다가와 “이것밖에 못 넣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 파란불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자정이 되자 돗자리를 펴고 침낭을 베고 누웠다. 화단을 지키는 경찰에게 “수고가 많으십니다. 먼저 자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경찰도 “고생이 많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시청광장 옆 플라자호텔 상공에 환하게 보름달이 떠 있었다. 이날 하루만은 분향소가 안전할 것 같았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분향소는 4월4일 중구청 철거 뒤
거대한 화단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 옆에 1평 남짓한
임시분향소를 다시 세웠다 경찰과 중구청의 철거 요구에도
천주교 미사 덕에 버티는 분향소
“협소하게나마 지킬 수 있던 건
연대하는 이들이 자릴 지킨 덕분”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인도에는 거대한 화단이 있다. 가로 20m, 세로 2.5m쯤 되는 이 화단에는 덕수궁 담장보다 2배가량 높은 나무가 대여섯 그루 있고, 수풀이 무성했다. 군데군데 꽃들도 무심하게 피었다. 이 화단은 경찰의 특별관리대상이다. 이 화단을 지키는 데 투입된 경찰력만 20명 남짓으로 화단 앞에 15명, 인근 보도와 대한문 앞 광장에 5명 정도가 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무명의 근무인원은 하루 24시간 유지된다. 대한문 앞 대로변에 세워진 경찰버스 두 대에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교대근무하는 경찰이 나온다. 이 버스는 온종일 시동을 켜놓고 도로변에 매연을 뿜고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곳 화단 옆 대한문 앞에는 1평 남짓한 공간에 쌍용차 희생자 24명의 영정을 모신 분향소가 있다. 서울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8월18일 정오, 이 분향소를 지키던 김수경(51) 쌍용차 정리해고자는 화단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게 코미디지. 화단이 뭐라고 지들이 만들고서 지키고 있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일이여.” 김씨는 이 분향소가 임시로 세워진 간이시설물이라고 했다. 지난 4월4일 쌍용차 농성장과 분향소가 경찰과 중구청 공무원들에 의해 철거되고서 만든 임시분향소라는 설명이었다. 대한문 앞 횡단보도에서는 시민단체에서 근무하는 이대근(36)씨가 1인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쌍용차 국정조사를 실시하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방금 지나친 한 아저씨가 저를 보고서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쌍용차 사태에 대해 설명하더군요. 더운 날이라 서 있기도 힘들지만, 나름 보람 있어요.” 간이분향소 맞은편 대로변과 가까운 인도에서는 심영철씨가 8월24일에 있을 쌍용차 범국민대회를 홍보하고 있었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 4시에 서울역 광장에서 쌍용차 범국민대회를 개최합니다.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국정조사를 실시하기 위해 시민 여러분이 힘을 보태주세요.”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심씨는 틈날 때마다 대한문 앞을 찾아 자원봉사를 한다고 했다. 이날 홍보도 자원봉사차 하는 일이었다. 심씨의 뒤편엔 경찰버스 3대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그는 “안 그래도 날씨가 더운데 경찰차가 24시간 시동을 켠 채로 에어컨을 가동해 주변에 열기를 뿜어대고 있다. 시민들이 쌍용차 분향소를 보지 못하도록 이곳에 경찰버스를 세워놓은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성영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답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튿날인 19일 오후 6시, 매일미사를 준비하는 대한문 앞 광장을 다시 찾았다. 평택 쌍용차 공장 앞 송전탑 위에서 농성을 하던 문기주 쌍용차지부 정비지회장이 미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그는 대한문 앞이 갖는 공간적 상징성을 강조했다. “이곳 분향소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요. 부당한 탄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연대하죠. 이제 대한문 앞은 현대판 ‘신문고’와 같은 곳이 됐어요. 이제 더 이상 쌍용차만의 공간도 아닌 셈이죠.” 문 지회장은 임시분향소가 자리잡은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농성장과 분향소가 4월4일 철거된 이후 분향소만은 살려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임시분향소를 바로 설치했지만, 경찰과 중구청은 지속적으로 철거하려 했죠. 6월10일 김정우 지부장이 연행된 그날엔 저도 다쳤습니다. 경찰 100여명과 중구청 공무원 수십명이 몰려들어 밀어붙였죠. 여긴 집회신고를 한 곳인데도 끊임없이 침탈하려고 해요. 그나마 천주교 사제분들이 매일미사를 한 덕분에 이 분향소가 유지되고 있다고 봐요.” “이것밖에 못 넣어서 미안합니다” 저녁 6시 반, 미사가 시작됐다. 성가곡이 울려퍼지고, 정의구현사제단의 나승구 대표신부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시대가 ‘더 빨리, 더 빨리’를 추구할수록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외로움, 불안감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중요한 것을 찾고,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실천하게 하소서.” 미사에는 60명이 넘게 참석했다. 직장인 송오영(43)씨는 “회사가 이 근처라서 일주일에 2~3번씩 미사에 참석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신부님이 대신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천에서 온 주부 김옥이(51)씨는 “쌍용차 사태에 대해 잘 몰랐는데 최근 성당 신부님이 알려주셔서 매일미사에 와봤다. 남편이 남동공단에서 일하고, 큰아들이 목공 일을 하는데 쌍용차 사태가 남 일 같지 않다”고 밝혔다. 미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고 전태일 열사와 2살 터울의 남동생 전태삼(63)씨는 “미사 시간에 맞춰서 매일 온다. 협소하게나마 분향소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연대하는 이들이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뒤편에서 미사를 지켜보던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기독교 신자라 미사 형식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산책하러 나온 김에 미사에 들렀다”고 말했다. 미사가 끝나고서 만난 길음동성당(미아리성당)의 이순덕(75) 수녀는 “궁지에 내몰린 사람들의 처지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되도록 자주 찾으려 한다”고 말하고서 난간을 붙잡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미사는 40분가량 진행됐다. 대한문 앞에서 매일미사가 시작된 시기는 분향소가 철거되고 며칠 뒤인 올해 4월8일이었다. 나승구 신부는 “올해 초 24번째 희생자가 나온 이후 이곳 대한문 앞에서 종종 미사를 진행했고, 4월4일 분향소가 철거된 이후엔 매일미사를 꾸리고 있다”고 말했다. 매일미사는 천주교 교단에서 자발적인 참여로 유지되고 있었다. 수원교구, 인천교구 등 각 교구에서 하고 싶은 날짜에 신청하는 식으로 유지된다고 나 신부가 밝혔다. 그는 “신기하게도 누구에게 미사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는데도 지금까진 자발적인 참여만으로 미사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문 앞은 2009년부터 시민들의 추모와 참여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서 시민분향소가 차려졌고, 용산참사 희생자 분향소가 이어서 만들어졌다. 본격적으로 연대의 공간이 된 시기는 지난해 4월 쌍용차 분향소가 설치되면서다. 이창근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은 “처음엔 영정사진이 맨땅에 짓밟히고, 경찰과 충돌한 노조원들이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결국 대한문을 중심으로 연대가 확장됐고, 유대가 강화됐다”고 밝혔다. 이 분향소가 남대문경찰서, 중구청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면서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 강정마을회 등에서 연대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함께살자 농성촌’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올 3월 방화사건으로 농성장이 불탔고, 경찰과 중구청의 철거 시도가 거듭됐다. 4월엔 경찰 300명과 중구청 직원 50명이 투입돼 농성장을 철거했다. 미사가 끝나고 대한문 앞에 어둠이 깔렸다. 쌍용차 범국민대책위는 매일 밤 2명씩 당직을 서며 분향소를 지켰다. 이날 당번은 쌍용차지부의 김수경·한윤수 조합원이었다. 밤 11시가 넘자 분향소 앞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시민들은 밤이 늦어도 간간이 분향소에 들러 헌화를 했다. 한 청년은 모금함에 다가와 “이것밖에 못 넣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 파란불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자정이 되자 돗자리를 펴고 침낭을 베고 누웠다. 화단을 지키는 경찰에게 “수고가 많으십니다. 먼저 자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경찰도 “고생이 많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시청광장 옆 플라자호텔 상공에 환하게 보름달이 떠 있었다. 이날 하루만은 분향소가 안전할 것 같았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