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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사장 부인 승합차에 실려 팔려다녔다”

등록 2014-08-20 15:23수정 2014-08-20 17:08

캄보디아 여성 농업이주노동자 손 비솟(가명)이 한국의 첫 직장에서 일하며 작업 내용과 시간, 장소를 꼼꼼히 기록한 ‘수첩 일기’. 손 비솟 제공
캄보디아 여성 농업이주노동자 손 비솟(가명)이 한국의 첫 직장에서 일하며 작업 내용과 시간, 장소를 꼼꼼히 기록한 ‘수첩 일기’. 손 비솟 제공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 손 비솟의 수첩 일기
‘기회의 땅’ 한국에서 겪은 비참한 이주노동
나는 ‘팔려다니는 사람’이 되어 처음 보는 사람의 밭에서 일했다. 일당은 사장 부부가 챙겼다. 사장 부인은 새벽마다 우리를 깨워 차에 태웠다. 누군가의 밭에 내려두고 일이 끝날 때 데리러 왔다.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 손 비솟(33·가명)은 2012년 5월 한국에 왔다. 키 150cm 안팎의 작은 몸으로 전국의 밭과 공장으로 실려다니며 불법파견을 강요받았다. 그는 입국한 날부터 6개월간의 노동과 혹사를 날마다 수첩에 남겼다. 감정과 느낌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날 한 일의 내용과 일한 시간 및 장소를 꼼꼼히 적었다. 그의 수첩 일기는 국내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에겐 ‘예외적이지 않은’ 노동의 기록이다. 그의 일기(번역 ‘지구인의정류장’)를 뼈대로 삼고 그와의 인터뷰를 덧댔다. 그가 겪은 과거와 겪고 있는 현재를 재구성했다.  

계약서 근무지 강릉, 차 타고 간 곳 익산

2012년 5월8일 나는 한국에 도착했다.

나의 고향은 프레이웨인. 캄보디아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프레이웨인에서 우리의 밥은 하늘이 판단하고 하늘이 결정했다. 물이 부족한 마을에서 한 해 농사는 자주 전멸했다. 주민들은 고개를 들고 하늘의 선처를 기다렸다. 비가 오면 우리는 먹을 수 있었고, 비가 오지 않으면 우린 굶어야 했다.

“한국으로 가세요.”

텔레비전과 라디오 광고에서 캄보디아 남자는 말했다. 남자는 “한국이 기회를 줄 것”이라고 확언했다. 캄보디아에서 150달러(약 15만원)를 벌 때 한국에선 15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큰딸이다. 캄보디아의 큰딸들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200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중학교까지만 다녔다. 두 동생을 공부시켜 좋은 직업을 갖게 하고 싶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공장일을 희망했다.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한국어 점수(한국어 시험 점수가 낮은 사람은 농업과 어업으로 배치)도 받았다. 시험 결과가 나온 뒤 1년을 기다려도 채용하겠다는 연락이 없었다. 농업을 택하면 시일이 당겨진다고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채용 의사를 밝힌 사장의 계약서가 한국에서 왔다. 근무시간이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였다. 격주 토요일은 쉬는 날이었다. 기숙사도 제공했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계약서가 내겐 없었다. 입국하기까지 3천달러(약 300만원)가 들었다. 집안의 돈을 모으고 친척의 돈을 합쳤다. 은행에서 1천달러를 빌렸다.

5월11일 일을 시작했다. 고구마 줄기 자르기. 아침 6시~낮 12시. 낮 12시30분~저녁 6시.

3일간의 기초교육이 끝났다. 사장이 교육장으로 데리러 왔다. 그는 나를 차에 태워 전북 익산으로 갔다. 계약서에 적힌 근무지는 강원도 강릉이었다. 이상해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연락할 수 있는 휴대전화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익산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사장은 일을 시켰다. 고구마(익산은 국내 고구마 주산지 중 한 곳) 줄기를 자르라고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당황했다. 제대로 자르지 못하자 사장이 화를 냈다. “빨리빨리 하라”고 했고, “머리가 없냐”고 했다. 밭에서 일하던 한국 아줌마들이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했다. 사장 없을 때 눈치껏 쉬는 방법도 알려줬다.

과도한 노동시간과 초저임금에 시달리던 캄보디아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이 경기도 안산 ‘지구인의정류장’에서 짧은 쉼을 얻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과도한 노동시간과 초저임금에 시달리던 캄보디아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이 경기도 안산 ‘지구인의정류장’에서 짧은 쉼을 얻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5월25일 익산에서 강원도로 이동(아침 6시~낮 12시). 점심 먹고 무를 심었다. 낮 12시15분~저녁 6시30분.

2주 만에 강릉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일했다. 밭 말곤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했던 한국과 크게 달랐다. 속상하고 외로웠다. 비행기삯을 벌면 캄보디아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 95만원에 노동시간은 352시간

6월5일 무 북주기(식물이 넘어지지 않고 잘 자라도록 뿌리나 밑줄기를 흙으로 덮는 일). 아침 6시~낮 12시. 낮 12시30분~저녁 6시. 일 끝난 직후 충남 예산으로 이동. 밤 11시30분 도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계약 내용은 거짓말이었다. 매일 12시간 가까이 일했다. 월 226시간이라던 노동시간은 318~352시간에 달했다. 계약과 동일한 건 노동시간의 증가에도 변함없는 월급 95만원뿐이었다. 한국의 법은 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를 만들자마자 한국에 와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사장님 화나지 않게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후회됐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한국행이 늦어지더라도 공장일을 기다릴 것이다.

6월22일 새벽 5시 이동 시작. 배추 심기(강원도). 아침 6시~낮 12시. 낮 12시30분~저녁 6시. 저녁 7시 숙소 도착.

강릉 산비탈에 배추(해발 1200m 왕산면 안반데기는 국내 최고지대 배추 산지)를 심었다. 우리가 심은 배추를 거둘 땐 중국 노동자들이 팀을 이뤄 밭 근처에서 먹고 자며 수확했다. ‘취업장소’(계약서상 주소)인 왕산면에서 일한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장은 주로 충남 예산에서 운영하는 단무지 공장에 머물렀다. 사장 부인이 승합차에 태워 끊임없이 우리를 팔러다녔다. 많을 땐 15명이 차 안에서 포개지기도 했다. 전북 익산→강원 강릉→충남 예산→경기 평택→경기 안성→충남 태안→충남 아산→충남 서산(충남 최대의 총각무 산지) 등지를 오갔다. 고구마밭, 인삼밭, 배추밭, 무밭, 감자밭, 열무밭, 양파밭 등(전국 15개 이상의 작업장)에서 일했다. 사장은 우리를 다른 사람의 밭으로 데리고 다니며 우리의 노동을 거래했다. 밭일을 마치면 브로커에게 전화해 일거리를 따기도 했다. 나는 ‘팔려다니는 사람’이 되어 처음 보는 사람의 밭에서 일했다. 일당은 사장 부부가 챙겼다. 사장 부인은 새벽마다 우리를 깨워 차에 태웠다. 누군가의 밭에 내려두고 일이 끝날 때 데리러 왔다. 그는 우리를 끌고 다니며 불법파견업을 했다.

8월20일 무 심기. 아침 6시~낮 12시. 오후 1시~저녁 6시. 일 끝난 뒤 예산으로 이동해 밤 11시30분 도착.

아침 6시에 일을 시작하기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한 뒤 3~4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했다.  

“풀 뽑는 게 쉬는 거”

8월25일 오늘은 토요일. 하루 동안의 휴일. 하지만 공장에서 일함.

자고 있는데 아침 6시쯤 사장이 깨웠다. 예산엔 사장의 단무지 공장이 있었다. 예산에서 잔 다음날이나 밭일이 없을 땐 주로 사장의 공장에서 일했다. 격주 토요일이라던 휴일은 지켜지지 않았다. 다른 밭에서 우리를 ‘주문’하지 않으면 풀을 뽑거나 공장으로 불려가 단무지를 포장했다. 사장 부인은 “풀 뽑는 게 쉬는 거”라고 했다. 사장의 차 소리가 들리면 ‘일하러 가자’고 부를까봐 불안했다. 태풍이 온 날이 아니면 쉴 수 없었다. 왜 쉬게 해주지 않느냐고 사장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사장은 법(근로기준법 적용의 예외를 규정한 제63조)이 적힌 책을 가져와 보여주며 말했다.

“농장은 공장과 달라.”

왜 그런 법을 만들었는지 한국을 이해할 수 없었다.

8월26일 가장 더운 날. 고구마 줄기 따기

너무 더웠다. 쓰러질 것 같았다. 사장이 “빨리빨리”를 외치며 닦달할 때마다 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9월23일 무 캐기. 아침 6시~낮 12시. 낮 12시5분~오후 3시30분. 점심 식사를 하자마자 곧바로 일함. 9월14일 무 캐기. 새벽 5시30분~낮 12시. 낮 12시10분~오후 4시30분. 점심 식사를 하자마자 곧바로 일함.

5분, 10분 만에 밥을 먹었다. 사장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 밥을 먹다 말고 말도 안 한 채 농장으로 나갔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모든 노동자들이 따라갔다. 점심 시간이 몇 분밖에 안 되는 경우는 우리 사장과 일할 때였다. 다른 사람 밭에서 일할 땐 밥 먹는 시간은 30분 이상 줬다.

10월6일 일을 못 나갔다. 아픔.

몸살이 났다. 머리가 아프고 열이 끓었다. 오늘은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사장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캄보디아 집에 가고 싶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다.

11월12일 우리는 가야 했지만 사장은 서명해주지 않았다.

한방에 6명씩 잤다. 컨테이너 숙소엔 가스레인지가 없었다. 숙소 밖에서 나무에 불을 붙여 물을 끓였다. 컨테이너엔 화장실도 없었다. 호미를 들고 산속으로 들어가 땅을 판 뒤 배변을 해결했다. 밤엔 일 보러 나가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겨울엔 땅이 얼어 호미가 듣지 않았다. 슬프고 서러웠다. 화장실을 만들어달라는 말에 사장은 “돈이 없다”고 했다. 견디다 못해 사장에게 직장을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사장은 15일 뒤에 사인해주겠다고 했다. 사업장 변경에 동의해줬지만 15일치 임금은 주지 않았다. 11월27일 동료 2명과 일을 그만뒀다.

15일치 임금 못 받고 옮길 수 있게 돼

손 비솟은 현재 경기도 여주의 한 농장에서 일한다. 그의 컨테이너 숙소에 들어서자 한증막 열기가 육박했다. 천장과 벽에선 수십 개의 전기선이 얽히고설켜 누전이 우려됐다. 파리와 모기는 퇴치할 수 있는 개체 수를 넘어선 듯했다. 두 번째 직장에서도 손 비솟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고, 최저임금 이하의 시급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한 장소에서 일할 수 있고 쉬는 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훨씬 낫다고 했다. 최근 노동청에서 전 직장 사장의 임금 체불 사실을 일부 확인해줬다. 민사소송을 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주위의 조언에 그는 말했다. “여기 사장님한테 미안해서 시간을 뺄 수 없어요.”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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