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업체 씨앤앰 하청업체 노동자인 임정균(왼쪽)·강성덕씨가 15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옆 전광판 위에서 34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노동자 막다른 길, 고공농성
회사의 노동탄압과 해고
국가도 법원도 보호막 안돼
회사의 노동탄압과 해고
국가도 법원도 보호막 안돼
서러움에 사무친 노동자들이 계속 높은 곳으로 오르고 있다. 귀담아 들어주는 이 없을 때, 높은 곳에 올라야만 아래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공장 굴뚝, 고압 송전탑, 도심 전광판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은 높은 벽에 기대어 사는 담쟁이마냥 타고 오른다. 15일은 회사 분할 매각으로 일자리를 잃은 화학섬유회사 스타케미칼의 차광호씨가 구미 공장의 굴뚝에 오른 지 202일째다. 원청인 케이블업체 씨앤앰이 도급업체를 바꾸는 과정에서 노조원이라는 등의 이유로 노동자 109명의 고용승계를 거부한 데 맞서 ‘전원 원직 복직’ 등을 요구하며 씨앤앰 하청업체 노동자 강성덕·임정균씨가 서울 프레스센터 앞 전광판에 오른 지도 34일째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에 절망한 쌍용자동차 해고자 이창근·김정욱씨가 평택 공장 70m 높이 굴뚝에 오른 지 사흘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억울함을 더는 호소할 데가 없어 노동자들이 찾는 마지막 싸움터 하늘. 국내 고공농성의 뿌리는 1931년 5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혹한 식민지 시절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강주룡(당시 31살)이 임금삭감 철회를 요구하며 평양의 명소인 을밀대 지붕에 오른 게 지금껏 알려진 첫 사례다. 당시 그는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삭감)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임금삭감 철회 약속을 받아낸 그는 이후에도 파업 노동자 해고 철회를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체공녀’로 불렸다.
1931년 강주룡에서 시작한 노동자 고공농성은 80여년이 지나 김주익·김진숙(이상 한진중공업)·최병승·천의봉(현대자동차)·한상균·문기주·복기성(쌍용자동차)·이정훈·홍종인(유성기업)·여민희·오수영(재능교육) 등 수많은 점들을 이어 2014년 12월15일 다섯 해고 노동자한테까지 선으로 연결된다. 그 이름 하나하나가 모두 노동 탄압과 친기업적 국가의 소통 부재가 남긴 상처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장인 임상훈 한양대 교수는 “노동자들은 법원조차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등 국가의 공식 시스템을 믿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 싸움의 방법도 비공식적인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하루아침에 보호장치도 없이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으로 내몰리고 있는데도 국가가 오히려 계속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진단도 나온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국가가 사용자들한테 법질서를 지키라고 하는 대신 ‘(노동자와) 타협을 하지 마라’, ‘해고·간접고용을 마음대로 쓰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른 대안이 없는 노동자들이 최악의 선택을 하도록 자꾸 코너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늘에 오르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조금만 귀기울여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금방 드러난다. 가장 많은 목소리는 쌍용차 공장 굴뚝에서 들려오는 해고 요건 강화와 원직 복직이다. 2003년 6월 김주익 한진중공업 위원장이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랐고 8년 뒤인 2011년에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같은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농성을 벌이며 ‘희망버스’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노조 인정과 노조 탄압 금지도 노동자들한테 험난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창조컨설팅’의 도움을 받은 유성기업 경영진에 맞서 홍종인·이정훈 지회장이 노조 탄압을 멈추고 회사 쪽을 처벌하라며 2012년부터 올해까지 고공농성을 벌였으나 수사기관과 사법부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재능교육 노동자들도 해고자 복직과 단협 원상회복 등 노동기본권 회복을 요구하며 202일 동안 농성을 벌인 바 있다.
셋째 열쇳말은 불법파견이다. 국가권력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천의봉씨가 불법파견 처벌 등을 요구하며 고압송전탑에서 296일 동안 농성하고 법원이 현대차·기아차·쌍용차·한국지엠 등 완성차 4사 모두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는데도 아직까지 그에 걸맞은 형사처벌을 받은 기업 책임자는 없다. 이뿐만 아니라 법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되거나 차별 임금을 돌려받은 이도 아직까지 없다.
전종휘 김민경 기자 symbio@hani.co.kr
1931년 5월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강주룡이 임금삭감에 항의하는 농성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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