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입장따라 해석 달라져
‘사회적 책임과 부담’ 문구 등
향후 논란 불씨 여전히 남아
‘사회적 책임과 부담’ 문구 등
향후 논란 불씨 여전히 남아
23일 노사정이 동의한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원칙과 방향’ 기본 합의안은 노동계와 재계, 정부가 지난한 밀고 당기기를 거쳐 얻어낸 ‘언어 전쟁’의 산물이다. 평범해 보이는 단어와 문구에도 노사정의 처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진통 끝에 합의에 이르렀지만 ‘사회적 책임과 부담’, ‘노동이동성 및 노동시장 활성화’ 등의 표현은 여전히 논란의 불씨를 담고 있다.
김대환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장은 “노동시장의 구조개선을 노사정이 공동의 사명감을 가지고 함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추진하겠다는 결의”라며 “네덜란드 바세나르협약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1982년 노동시간 단축 등을 노사정이 타협해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 네덜란드의 사례에 빗댈 정도로 이날 합의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합의문에는 ‘사회양극화, 소득분배 개선, 비정규직 차별 시정 제도, 취약 근로자 소득 향상’ 등 외견상 노동지향적 가치를 담은 표현이 꽤 많다. 하지만 한국노총의 반대로 ‘유연화’라는 문구가 빠지고 ‘해고 요건·비정규직 사용 제한 완화’라는 큰 방향만 담겼지만 이는 세부 과제 논의 과정에서 한국노총의 발목을 잡을 덫이 될 위험이 있다.
이번 합의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노사정은 사회적 책임과 부담을 나누어 진다’는 원칙, ‘노동이동성 및 고용·임금·근무방식 등 노동시장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방향, 2015년 3월로 못박은 논의 시한이다. 한국노총은 애초 “‘부담’이라는 단어를 바탕으로 노동자만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고 논의 시한을 명시하면 정부 일정에 맞춰 들러리 서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며 관련 단어를 빼자고 요구했다. 한국노총의 요구 탓에 19일 9시간 넘는 협의에도 합의안 초안 마련에 실패했다. 그런데 이런 핵심 쟁점은 결국 최종 합의안에 담겼다. “합의를 거부하고 대정부 투쟁을 하는 것보다 정부 정책의 독주를 막을 대화가 우선 필요하다”는 내부 결정을 바탕으로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이 22일 대표자 회동에서 이들 문구가 포함된 최종 합의안에 동의해서다.
‘노동이동성 및 고용·임금·근무방식 등 노동시장의 활성화’라는 표현도 정규직 해고 요건 완화의 빌미가 될 ‘고용 유연화’를 연상케 한다. 이 표현은 앞으로 논의 과정에서 정부·재계 쪽 주장의 근거로 활용돼 한국노총을 압박할 우려가 있다. 박성식 민주노총 대변인은 “비정규직 차별 시정 제도, 취약 근로자 소득 향상 등 긍정적인 내용이 있지만 정부가 책임과 부담을 나누자는 문구를 노동시장 하향평준화 명분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무엇보다 국내 노동자 조직률이 10.3%에 그치고 그나마 민주노총이 빠진 탓에 전체 노동자의 4.6%만을 대표하는 한국노총이 합의를 하더라도 노동 현장 전반에 구속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전병유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네덜란드처럼 조직률과 협약 적용률이 높거나 노사 간의 신뢰 수준이 높지 않고 총연맹이 현장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한국에서 합의문 적용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경 전종휘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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