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은 피해자들의 산재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선·철강·제철업 1350곳 조사서
원청·하청 상당수 “산재, 공상처리”
고용부, 비객관적이라며 “빼라” 요구
최종 조사보고서엔 관련내용 안실려
원청·하청 상당수 “산재, 공상처리”
고용부, 비객관적이라며 “빼라” 요구
최종 조사보고서엔 관련내용 안실려
고용노동부 산하 기관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외부 연구진에 산업재해(산재)와 관련한 조사를 의뢰해 놓고 ‘산재 은폐’와 관련한 내용을 최종보고서에서 빼도록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조사 대상이 최근 하청업체 노동자의 산재 발생 빈도가 높은 조선·철강·제철업종이어서, 노동계는 “고용부가 부담을 느껴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이인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12일 공개한 ‘주요업종별 원·하도급업체 실태조사 및 맞춤형 재해 예방 사업의 효과적인 확대 방안에 관한 연구’를 보면, 설문조사 주요 내용에 포함된 ‘산재 은폐’ 조사 결과가 누락됐다. 이 보고서는 하청업체 노동자의 산재 사고 때 원청한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자 개선 방안을 마련하려고 추진된 것으로, 사단법인 한국안전학회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 5~10월 조선·철강·자동차 원청업체 40곳과 하청업체 1310곳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산재 은폐’와 관련한 조사 결과가 중간보고서엔 들어있는데 최종보고서에선 통째로 빠졌다. <한겨레>가 입수한 ‘산재 은폐’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업체별로 최소 20%에서 최대 52%까지 ‘산재를 공상(공무 중 부상으로 간주해 치료비 등을 회사가 부담)으로 처리했다’고 답했다. 조선업계에선 원청업체 23곳 중 52%, 하청업체 931곳 중 34%가 산재를 공상 등으로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철강업과 자동차업의 실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원청과 협력업체가 산재를 직간접적으로 공상 등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기업들은 통상 노동자가 사고를 당하면 산재가 아닌 공상으로 처리하려 한다. 산재로 처리하면 부실한 안전관리를 이유로 고용주가 처벌을 받거나 작업 환경 개선 등의 요구를 받을 수 있어서다. 산재보험료가 상승하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조사 결과가 최종보고서에서 빠진 이유에 대해 고용부 관계자는 “산재 은폐는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어 객관적인 근거가 떨어지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게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안전공단 관계자도 “산재 은폐는 파급력이 커서 객관성이 중요한데 설문조사는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어서 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계는 “공식적인 산재 은폐 통계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 설문조사는 그 실태를 처음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계기였다”고 짚었다. 박세민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원·하청 불문하고 산재 은폐가 많다는 의혹과 관련해 이렇게 광범위하게 조사한 적은 없었다”며 “회사들도 산재를 은폐한 적이 있다고 답한 만큼 정부는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은폐를 막을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결과 자체를 삭제했다”고 비판했다.
보고서 심의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설문조사가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원·하청업체의 산재 은폐를 가늠해 볼 하나의 척도인데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짚었다.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산재 위험 직종 실태조사’를 벌여 산재를 경험한 조사 대상 하청노동자 중 92%가 “산재 처리를 받지 못했다”는 조사 결과를 공개한 바 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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