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일
풀 향기 꽃내음 향기 그윽한 5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등 가정의 달입니다.
산과 들은 연한 녹색의 잎으로 새싹이 돋고 알록달록 연분홍과 하얀 철쭉과 연산홍 그리고 하얀 싸리나무 꽃들이 마음과 가슴을 상쾌하게 채워주고 생동감 있게 진한 푸르름 으로 짙어만 갑니다.
저는 나이 52의 수원에서 거주하고 있는 홍 길동(가명)입니다.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각자의 삶에 앞뒤를 돌아다볼 겨를조차 없는 각박한 세상에서 참으로 고맙고 그 은혜 잊지 못할 일이었기에 아니, 기적 같다고 할까요.
남들 애기를 흘려서 들어본 즉 있을법한 사례를 직접 경험하고서 감사와 은혜에 보답도 할 겸, 또 지금 이 시각 우리의 세상사 저와 같은 어려움과 절망과 고통의 시달리는 분 을 위해 저의 이 기적 같은 사례를 공개하려 이 글을 올립니다.
저는 작년, 2009년 3월 말경부터 허리가 아프고 목덜미와 가슴에 열이 있어서, 감기이거나 몸살이려니 생각하고 유명하다는 한의원과 신경외과에서 1개월 여 동안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고, 빈혈증세로 계단을 오르는데 숨이 차고 밤에 잠을 자는데 식은땀이 이불을 흥건하게 젖게 하고 몸무게가 하루하루 다르게 빠지어, 시내 병원에서 종합 진찰을 받으려고 입원을 하였습니다.
입원 후 몇 가지 영상촬영과 x-ray 검사, 혈액검사를 위해 채혈을 하고 다음날 주치의 선생님께서 헤모글로빈 수치가 5.5로(정상수치는 11~13) 수혈을 하여야 한다고 하시어 보호자를 부르고 정확한 병명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수혈을 하지는 않겠다하여, 서울대학교분당병원으로 급하게 이동하여 응급실에서 재검사를 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분당병원 응급실에서 정확한 병을 진단 받고자 빈혈의 원인을 찾으려고 위에 콧줄을 시술하고, 장 출혈이 있는지 직장을 통한 검사와 채혈 검사 후에 응급실 주치의께서 조용히 부르더니 몇 가지 검사 결과를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검사결과로 위와 장 출혈은 없습니다, 그런데 위험한 병이 의심이 가는데, 골수검사를 통하여 정확하고 최종적인 진단을 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며, 오늘은 금요일 오후이고, 채혈을 통한 유전자 검사와 골수검사는 주5일제 휴무로 인하여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검사를 시행하지도 못하고, 또한 골수검사를 한다고 하여도 서울대학병원 본 병원(혜화동)에서 하기 때문에 결과가 일주일 이상 소요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큰 병원이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에서 진단결과 소요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반문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환자 상태가 심각하오니, 서울에 있는 규모가 큰 다른 병원으로 한시라도 빨리 가야한다면서 소견서와 함께 서울에 있는 삼성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통하여 협조하여 저를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삼성병원 응급실에서 몇가지 추가검사를 위하여 채혈과 심장초음파 촬영 그리고 우측 엉덩이 골반에서 골수를 채집하는 시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잠시후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저와 제안의 해(아내)는 큰 병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3월 말경부터 다니던 병원에서는 심장 승모판에 이상이 있다(나중에 알고보니 오진)하여 약물치료로 치료를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큰병은 의심도 하지 않았고, 작년에도 회사에서 있는 행사 중에 10Km단축마라톤을 완주하고 2개월에 한번씩 전혈(400CC)헌혈을 년간 5회씩 헌혈을 할 정도로 건강 하였습니다.
과음도 하지 않을뿐더러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건강관리를 위해 핼스장에서 매일 매일 유산소운동을 하고, 젊은이들만이 탄다는 스키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만능스포츠맨은 아니더라도 적절한 운동을 하고 가급적이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왔었습니다.
그렇게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급기야 수혈을 하게되고 응급실내 무균실로 들어가게 되고 응급실 주치의는 저의 아내를 조용히 불러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불려간 저의 아내는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수혈중인 제게 오지도 않고 있어 저는 불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저는 아내를 찾기 위하여 응급실 주변을 찾아 헤메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서 저에게 무슨 병인지 설명을 해주어도 괜찮으니 말씀해달라고 하여 치료를 잘 받으면 나을수 있는 병이라고 위안을 주시고 있는데 아내가 저 멀리서 웃으면서 제게 다가오더군요,
주치의 선생님께서 아내를 불러다가 백혈병이라는 진단 내용을 설명해주자, 놀란 아내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당황을 하고 담대하게 받아들이고자 눈물을 참으며 마음을 추스르려고 병원 응급실 밖에 있는 화단에서 안절부절 하다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시간여동안 서성이다가 제가 있는 응급실 무균실로 오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우리 내외는 아무 말 없이 서로만 바라보다가 환자이송요원이 휠체어를 가지고 무균실 전용병동으로 가야한다고 하여 생전 타본적이 없는 휠체어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환자를 이송하는 아저씨는 바쁜 걸음으로 휠체어를 끌고 가는데 제가 뒤를 돌아보니 뒤따라오는 제 아내는 따라오는 발걸음이 더디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저씨 미안하지만 천천히 가 주세요. 제 아내가 따라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 많이 놀라고 당황하여 따라오질 못하니 같이 가십시다”
저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었습니다.
응급실 복도를 지나서 건물과 건물을 지나 어느 병동 건물로 들어서는데 제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암센터라는 커다란 글자가 저를 안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암센터라는 글자가 제 생전에 그렇게 큰 글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암센터라는 글자와 뒤에서 더디게 따라오는 아내를 보는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저 또한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기에 암센터 건물을 들어서는 문턱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여 저를 이곳에서 고쳐 나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단발마적인 소리로 간구하였습니다.
주님! 아직 가정을 책임져야 할 시간이 제게 주어져있습니다. 꼭 이병을 이겨내도록 힘주시고 능력주시길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두아이의 아빠이며 사랑하는 제 안의 해(아내)를 지켜주어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환자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 무균실 병동에 도착하였습니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몇가지 질문을 하시고, 병실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설명해주시는데 생소한 내용에 어리둥절 할 따름이었습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침상에 올라보니 참으로 한심하였습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오시어 항암치료는 바로 들어가게 됩니다. 급성 림프구성,골수성 혼합형 백혈병입니다.
1주일 후에 나오는 유전자 검사 결과에 따라서 골수이식을 하여야 합니다.
머리가 빠지고, 구토가 심하여 음식을 못 먹습니다. 입안이 헐고 점막이 있는 장기에 염증이 생기며, 설사와 혹 치질이 있다면 하혈도 할 수 있습니다.
가족과의 면회는 하루에 두 번 오후2시와 저녁7시에 10분씩만 허용됩니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담대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외로움도 두려움도 없이 주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래 좀 쉰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치료받고 꼭 이겨내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였습니다. 하루 하루 항암제가 들어 올때마다 그래! 지금 영양제가 들어오는구나. 내가 조금 피곤하니까 박카스에 우루사를 먹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을 먹었습니다.
적혈구가 부족하니 빨간 피를 수혈하고 혈소판이 부족하니 혈소판을 수혈하게 되고, 수혈 부작용도 심하였습니다. 냄새가 싫고 먹는 음식마다 토하면 먹어야 산다는 일념으로 토한 음식을 밷지 않고 다시 삼키면서 그렇게 2주를 보냈습니다. 하루에 2번 10분씩 만나는 아내에게 너무너무 미안하였습니다. 고3인 아들에게는 수능 공부에 지장을 줄까봐 아빠가 잠시 장기출장간 것으로 발병 사실을 숨겼습니다. 대학2학년에 재학중인 아들에게마저도 발병 사실을 숨기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고 몇주만 투병하면 끝나는 병인줄 알았습니다.
백혈병이라는 말은 드라마나, 소설속에서 풍자되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전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성덕 바우만 이라는 청년이야기가 순간 떠올랐습니다. 골수 이식후 건강을 회복하였다는 매스컴의 이야기가 저의 일로 다가온 것입니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도 백혈병이 무엇인지? 어떻게 치료하는지? 모두들 아는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항암주사를 맞고 못 먹고 토하고, 열이나고 혈압이 떨어지고 하루에도 한두명씩 항암제를 이겨내지 못하고, 합병증 등으로 중환자실로 가는 환자, 처치실로 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불안감이 제게도 엄습해옵니다.
면역력 저하로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도 없습니다. 병원에서 지시한 음식 외에는 심지어 물조차도 병원에서 주는 물과 지정한 음료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백혈병이 여러 가지로 M2, M3, 골수성, 림프구성, 몇가지로 분류되어 같은 백혈병 환자일지라도 치료방법이 부분적으로 많이 달랐습니다.
저는 5월16일부터 약 5주간 관해치료(백혈병 1차 항암 화학요법치료)를 끝내고 1주일간의 휴가를 받아 집에 귀가를 하였습니다. 일주일 휴가를 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항암요법 2차 치료를 공고라고 하는데 공고를 들어가는데 필요한 체력보강을 위한 휴가이었습니다.
1차 항암치료인 관해 치료 중에 떨어진 체력과 심신을 보충하여 2차 항암치료(공고)를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약5주동안 병원에서의 식사는 거의 못하였고 약물치료로 인하여 체력은 떨어질대로 떨어지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70kg나가던 몸무게가 60kg 그나마 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음식을 섭취하려는 의지 때문에 60kg을 유지 하였습니다. 잘 먹어야 2차 공고를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고단백음식을 억지로 섭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음식에 제한이 있습니다. 면역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고온으로 끓이어야만 하며, 조개류와 대부분의 어패류는 섭취가 허용되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래도 일주일간의 집에서의 요양으로 65Kg체중을 유지 하게되고 드디어 2차 공고를 들어갔습니다. 또다시 항암제가 저의 혈관을 타고 들어오게 됩니다. 1차 관해 때 보다도 더 독한 항암제가 저를 아주 힘들게 하였습니다.
골수검사를 주기적으로 하는데 골수채집이 안되어서 20분이면 끝나는 골수채집이 2시간이 넘게 소요되고 완쪽 골반에서 채집이 안되니 오른쪽 골반에서 하루에 5번을 찌르는 고통도 함께 하였습니다. 항암제와 몰핀 부작용으로 고열에 합병증으로 사경을 헤매이기도 하였습니다. 2차공고후에 회복기 중에 오른쪽 눈이 충혈 되고, 시력을 잃어버릴 뻔도 하였습니다. 열손가락 손톱이 모두 빠지는 고통은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에 쏙 빠지는 아픔보다 서서히 몇일 몇 날을 두고 빠지고 있는 아픔은 제게 많은 것을 용서와 회개의 시간으로 보내었습니다.
1인실 무균실 에서 혼자서 많이 울기도 하였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이 나중에는 통곡이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간구하는 기도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눈물로 무균실의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오른쪽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고 안구가 돌출된 모습을 본 아내는 얼마나 놀랬는지 말로도 글로도 형언 할 수가 없습니다. 고3인 수능 준비생과 저를 위하여 수원에서 서울까지 매일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흘린 눈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무균실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에 한편으로는 골수이식을 하여야 하니 골수공여자를 찾아야하는 저의 아내의 피 땀 어린 수고와 노력의 대가는 세상 어느 것 에도 비유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나만으로 아들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장한 어머니이시고 아내이었습니다.
골수 공여자는 우선 가족 중에 찾아야 합니다.
저는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두 아들 중에 건강한 큰아들이 제게 골수를 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간 중에 공여자를 찾아보고, 없으면 국내에서 골수 기증자 중에, 형제와 국내 기증자 중에 없다면 외국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혈액형이 B형이니 B형의 혈액형을 가진 자 중에 혈액형 만 일치한다면, 아들이나, 사촌, 외사촌, 친구나 직장동료가 골수를 공여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형제가 9남매입니다. 다행입니다. 골수공여자는 가급적이면 나이가 젊을수록(50세미만자) 좋다고 합니다.
9남매이지만 제가 막내이다 보니 모두 50대, 60대입니다. 나이어린 순서대로 바로위인 누이부터 유전자 일치 검사를 하게 됩니다.유전자 검사도 고액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8명의 유전자 검사를 동시에 하면 좋으련만 고가의 검사비용 때문에 1명씩 나이어린 순서대로 채혈을 하고 검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검사소요 시간이 7일에서 10일이 소요됩니다. 저는 골수이식(조혈모세포)을 위하여 치료는 계속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한사람 검사가 들어가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희망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검사실에서 전화가 옵니다. 일치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다음순번인 3 번째 누이가 검사를 받습니다. 또 다시 7일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일치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2번째 누님이 검사를 들어갔습니다. 멀리 지방에 계신 60이 넘은 누님이 올라오시었습니다. 동생에게 골수를 주어 살려보겠다고, 그런데 일치하지 않습니다. 일치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을때마다 절망에 빠집니다. 급기야 8명중에 7명을 하였습니다. 모두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65세이신 제일 큰 형님만 검사대기중입니다.
9 형제 중에 7명과 유전자가 일치하는 형제가 하나도 없다고 하니 저는 주워온 자식인가 봅니다. 유전자 일치 확률이 형제간 중에 25%라고 합니다. 그렇게 높은 확률은 아니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다산을 하여서 저 같은 경우에는 다행 중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8명중에 7명까지 유전자 검사를 하였는데 일치하는 분이 안계시니, 급기야 나는 누나와 형들의 동생이 아닌가 보다라고, 나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님한테 물어볼 수 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여자가 없다면 수차례 있을 항암 화학요법을 이겨내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정신무장을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희망인 65세의 큰형이 계십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큰형님은 빠쁜 농사일로 논밭을 한시라도 비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픈 동생을 위하여 유전자 검사를 위해 상경하시었습니다. 채혈을 하고 유전자검사가 들어간지 일주일후 기적이 일어납니다. 일치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나 기뻐합니다. 저의 아내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저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이식을 하기 위한 준비와 이식 D-Day 일정을 잡고 이식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유전자는 일치하지만 공여자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여야 합니다. 공여자의 건강 상태가 전반적으로 매우 양호하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건강 검진중에 큰형님께서 갑작스런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사거리에서 정면 충돌이 있어지만 다행히도 중상은 아니지만 약물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거기다가 건강검진 결과가 콩팥에 이상이 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교통사고로 입은 상해치료와 콩팥치료를 위한 약물치료가 조혈모세포를 채집하는데 영향이 있을까봐 고통을 참고 견디어냅니다.
다행히도 콩팥치료는 저에게 골수이식 후에 치료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이식 수술 전에 저는 전 처치라고 하여 다시 항암치료에 들어갑니다.
저의 몸속에 있는 골수를 완전히 제거하여, 형님의 골수를 이식하기 위하여 힘든 과정을 또다시 겪어야 합니다.
드디어 힘든 과정을 잘 견디어 내고 골수이식을 하기에 이르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일 큰 형이신 형님이 저의 생명에 끈을 이어주십니다. 65세의 나이에 사랑하는 동생에게 골수이식을 하시게 하여 송구하고 감사한마음 한량 없습니다. 저의 생일이 9월16일 입니다. 골수이식일자가 9월15일입니다. 생일 하루 전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혈액형이 A형 / 저는 B형입니다.
골수이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면 혈액형이 B형에서 A형으로 바뀌게 됩니다.
혈액형이 바뀌어야 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이식후에 치료 과정 또한 험난합니다. 오히려 이식후에가 더더욱 치료 과정중에서 중요합니다.
숙주반응이라고 하여, 새로운 골수가 생착 하기 위하여 일어나는 부작용이 뒤따르게 됩니다.
항상 긴장의 연속입니다. 면역력이 약하여, 치명적인 거대세포 바이러스 라는게 발생하는데 복병입니다.
입안이 헐고 점막이 있는 식도와 위장관, 그리고 소장과 대장에도 이상이 발생합니다.
간의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고, 호흡기관과 신장 그리고 특히 폐렴등에도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이식후 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식편대 숙주반응이 지난 3월에 오면서 아주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다행히 많이 호전되고 있어서 지금은 음식을 조금씩 섭취하고 산책과 가벼운 운동도 하면서 하루하루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혈액형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치유 되리라 확신 합니다.
지난 5월4일에 저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위하여 유전자 검사를 위하여 채혈을 하였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확신 합니다. 제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지난 3월23일에 큰아들이 군대에 갔습니다.
아버지의 중병으로 걱정과 염려로 군 입대를 연기하여야 하는 기로에 있었지만, 군대에 가서 신병교육을 받고 건강한 기를 보내주겠다고 이식편대 숙주반응으로 숨쉬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버지를 두고 군대에 갔습니다. 지금은 신병 교육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 받아 자랑스런 대한민국 이등병으로 복무 중에 있습니다. 아들이 교육받는 모습을 신병교육대 카페를 통하여 매일매일 아들의 교육받는 사진이 올라오지는 않을까 라는 기대로 5주간의 신병생활과 저의 투병생활은 함께하였습니다.
요즘은 제가 군생활 시절과는 달라진 점이 많이 있습니다. 신병교육대 인터넷 카페가 있어서 훈련병들의 교육상황을 실시간으로 부대 정훈장교님깨서 시간을 내어 가족들에게 알려주는 코너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편지도 전달되기도 하여 매일매일 아들에게 훈련 잘 받고 건강 하라는 편지도 보내기도 합니다. 제가 힘들고 지쳐있을때에 신병교육대 카페를 찾는 기쁨으로 투병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때부터 헌혈을 하였습니다. 나눔의 실천이지요, 골수기증자로 등록하였습니다. 지금은 자칭 골수기증자 전도사로 활동한답니다. 우리나라는 피를 수입하는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국민들의 헌혈에 참여의식이 저조하다고 합니다. 또한 골수기증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합니다. 저는 다행히 저의 형님과 유전자 일치로 인하여 골수이식수술을 받아 어려움 없이 치료중에 있지만,
지금도 골수이식을 하여야 하지만 기증자가 없어서 외국에서의 기증자를 통하여 새 생명을 찾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외국의 골수공여자에게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됩니다. 환율과 상대국가에 따라서 다르지만 5천만원에서 1억여원이라는 큰돈이 들어가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아보지도 못하는 환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도 보았습니다. 골수공여를 하겠다고 하였으면서도 마음이 달라져서 골수기증을 번복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골수 이식전에 전 저치라는 항암치료 과정중에 골수기증번복과 약속한 사람이 사라져 죽어간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골수 공여 하는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골수 공여 후에 대부분 짧은 시간내에 공여자는 회복되어집니다. 헌혈하듯이 조혈모세포만 채집하는 것입니다. 5시간 정도 채집후에 당일로 활동합니다.
적십자혈액원에 가셔서 골수기증의사를 밝히면 채혈을 통하여 등록하고 유전자 일치되는 환우가 있을 때에 조혈모세포 기증협회에서 연락이 오면 건강 검진 후에 하루정도 입원하여 조혈모세포만 공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백혈병 환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골수기증자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사랑을 실천하였으면 하는 큰 바램입니다.
끝으로 지금까지 치료해주신 의료진과 저의 투병 생활중에도 지금도 기도로 함께 해주시는 이웃가족과 친지에게도 그리고 제 아내에게도 사랑과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뜻있는 분들의 헌혈과 골수기증자가 많이 늘어나고 참여하시어 백혈병환우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십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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