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백혈병 등 직업병 보상위원회 신청자가 60명을 넘어섰지만 조정위원회와의 모호한 관계 탓에 피해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사회적 대화’를 포기했다는 비판과 함께 여전히 협소한 보상 대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23일 ‘반도체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보상위원회’(보상위) 접수를 시작한 지 닷새 만에 61명이 신청해 이르면 추석 뒤 첫 보상금이 지급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삼성은 지난 3일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권고한 공익법인 설립을 거부하고 1000억원의 기금을 내어 독자적인 보상위를 출범시켰다. 보상위의 보상 대상은 반도체·엘시디(LCD) 사업장에서 2011년 1월1일 이전에 입사해 일한 원·하청 노동자로, 보상 질병을 1군(백혈병, 림프종, 다발성 골수종, 골수이형성증후군, 재생불량성 빈혈, 유방암), 2군(뇌종양), 3군(난소암, 차세대질환, 희귀질환, 희귀암)으로 나눠 차등 보상할 예정이다.
그러나 삼성은 조정위와 보상위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조정위는 지난 17일 보도자료를 내어 “삼성전자가 제시한 보상 방식이 조정위 조정 절차와 병행할 수 있는 방식인지 논란의 소지가 있다”며 “보상 대상자들을 대표하는 교섭 주체 사이에서 원만한 합의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보상 문제의 사회적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조정위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 삼성, 삼성 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참여하는 비공개 간담회를 제안했으나 가대위의 불참 선언 등으로 아직까지 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의 독자적인 보상으로 조정위가 무력화되고 협소한 보상 대상도 그대로라 피해자들의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전신성경화증을 앓는 이혜정(38)씨는 “보상 신청 안내 전화를 받았지만 모든 피해자들에게 똑같이 보상해주지 않고 선별적으로 자체 심사를 거친다는 데 화가 났고 삼성의 영향력이 큰 보상위에 개인적으로 신청하는 것도 불안하다”고 말했다. 퇴사 14년 뒤 유방암 진단을 받아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박민숙(42)씨도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다 유방암에 걸렸고 그 부작용으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누구는 보상하고 누구는 보상하지 않는 건 보여주기식 보상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정위에 참여했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비판도 이어졌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의 모임인 반올림은 “삼성은 일방적으로 보상 신청을 받으며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르자는 조정을 거부하고 사회적 대화 자체를 정리해버리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가대위 피해자와 가족 5명과 달리 보상위 참여를 거부하고 삼성 본관 앞에서 15일째 농성중인 정애정씨도 “삼성 홀로 보상을 추진하는 것은 신뢰를 저버린 행위”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시민단체인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ICRT)’의 설립자인 테드 스미스씨가 지난 8월 삼성전자에 보낸 조정위 권고안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공개서한 서명 참가자가 1만명을 넘어섰다. 이와 관련해 삼성은 지난 10일 테드 스미스씨에게 메일을 보내 “조정위 제안 가운데 사단법인을 제외한 대부분을 받아들였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 메일에서 삼성은 또 적극적으로 조정위 설립에 나섰던 기존 태도와 달리 조정위를 “가대위에 의해 제안돼 만들어진 비공식적이고 사적이며 강제성 없는 단체”로 규정했다. 이는 삼성전자가 조정위원장으로 김지형 전 대법관으로 선임하는 것에 동의하는 등 조정위를 존중했던 기존 입장과는 다른 발언이다.
김민경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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