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생활 10년만에 돈벌러 1월 귀국
하청업체 폐업에 다섯달 만에 실직
한달반치 임금체불…다른 일자리도 없어
“노예나 다름 없는 물량팀 없애야”
하청업체 폐업에 다섯달 만에 실직
한달반치 임금체불…다른 일자리도 없어
“노예나 다름 없는 물량팀 없애야”
10년전 미국으로 투자이민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던 이아무개(46)씨는 지난 1월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한때 한주에 천만원 가까이를 벌 정도로 잘나가던 ‘사장님’이었지만 미국의 경기불황으로 힘들어지면서 공장을 폐업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려 했지만, 영어실력도 모자라고 신분도 불안정해 쉽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 이씨의 눈길을 끈 채용광고가 있었다. ‘월 300만~400만 보장. 숙식제공’. 조선소 물량팀(재하청 계약직)의 ‘조공’(기술자를 돕는 보조작업자) 일자리였다. 시민권 취득을 위해 미군에 입대한 아들의 신분이 안정될 때까지 한국에서 돈을 벌기로 마음 먹었다. 바짝 일하면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2월부터 경남 거제에 있는 삼성중공업 조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씨의 꿈은 얼마 안돼 깨졌다. 일한지 다섯달만에 ‘월급 300만원’은 커녕 300만원의 임금이 체불됐기 때문이다.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씨는 “물량팀은 노예나 다름 없었다”고 털어놨다.
근로계약서도 없고,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기술자를 도와 배의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가 전선을 까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물량팀장이 잡아준 공동숙소에서 생활했다. 새벽 5시반 알람소리에 일어나 숙소에서 나온 뒤 하루 10~11시간씩 일하고 돌아가면 밤 10시가 넘었다. 일당 9만5000원에 잔업수당을 합쳐 4월엔 230만원까지 받기도 했다. 생활비를 빼고 남은 돈 200만원 정도를 미국으로 송금했다.
지난 5월 고성해양조선으로 가면 일당을 10만5000원 쳐준다는 광고를 봤다. 한달이면 20만원 넘게 더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리를 옮겼다. 고성해양조선(원청업체)의 하청업체 아래 있는 물량팀이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 고성조선해양의 모회사인 에스티엑스(STX)조선해양의 법정관리설이 흘러나왔다. 근로시간이 점점 줄더니 지난달 21일엔 “더이상 나오지말라”는 하청업체 관리자의 말을 들었다. 이 하청업체가 기성금(원청이 주는 용역대금)을 받지 못하고 폐업했기 때문이다. 이씨의 물량팀장인 박아무개씨는 “3년반 동안 고성에서 일하면서 돈 때문에 애먹은 적은 없었는데 이런 일이 처음 닥쳐 나도 황당하다”며 “물량팀 20여명이 4000만여원을 받지 못했다. 7월에 준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달 반치 임금 300만원을 받지 못했다.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아 임금체불 신고 서류를 준비하는 것도 벅차다. 이씨는 “돈을 못받은 것도 문제지만, 돈을 못받게 된 게 물량팀 구조 때문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 화가 난다”고 말했다. 이씨는 “구직을 원하는 노동자들의 서류만 팔아서 중간에 수수료를 챙기는 업자들도 수두룩하다. 초짜들 불러다 인원만 채우고 넘치면 다른 사람한테 팔아넘기는 등 노예나 다름없다. 이런 제도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조선소가 아닌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잘 풀리지 않고 있다. 충남 아산의 삼성엘시디(LCD) 공장 건설 현장에 가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울산의 건설현장으로 거의 갈 뻔 했지만 결국 자리가 나지 않아 못가게 됐다. 이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일밖에 할 수 있는게 없으니 더 답답하다”고 말했다.
거제·통영·고성에서 지난 2~6월간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신고한 노동자는 모두 3268명이며, 체불임금액은 153억1700만원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노동자 수는 59.9%, 체불임금액은 83.5% 증가한 수치다. 이씨와 같은 물량팀 노동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공식적인 통계로 확인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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