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앞에서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인 천일기업 노동자들이 임금체불에 항의하며 상복을 입고 집회를 하고 있다.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 하청업체 천일기업 노동자 4명은 지난 5일 오후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앞 뜨거운 비탈길 좁은 인도 위에서 상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지난 7월 업체가 도산하면서 발생한 24억원의 체불임금을 원청인 삼성중공업이 해결하라는 취지로 나흘째 노숙농성 중이다. 입사 12년차, 퇴직금 5000여만원을 떼인 문주민(54) 비상대책위원장은 “노후를 대비해 퇴직금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졸지에 떼이게 되어 막막하다”며 “일이 이 지경이고 추석도 코앞인데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천일기업은 2004년부터 삼성중공업 해양플랜트 현장에서 배관작업과 기계설치 업무를 담당했다. 지난 7월18일 회사의 박아무개 대표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회사를 도산 처리했다. 못준 임금은 어떻게 해서든 주겠다”며 폐업 사실을 알렸다. 하청업체 본공(정규직) 노동자 190여명과 물량팀(재하청 노동자) 70여명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 이들이 못받게 된 7월 임금과 퇴직금은 24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16억원은 체당금 등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나머지 8억원은 소송 등 지리한 과정을 거쳐야만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돈을 줘야할 회사 대표 박씨는 올해 1월부터 총무로 근무하던 아들의 월급을 400만원에서 800만원으로 올리고, 아들 명의로 된 집의 빚 1억여원을 회사 폐업 직전에 갚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했다. 박씨는 6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원청에서 기성금(하도급 대금)을 깎고 수정·추가작업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원청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한 상태”라며 “임금체불을 최대한 빨리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원청인 삼성중공업은 “이미 줘야할 기성금은 다 줬고 경영진이 경영을 잘못해 폐업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며 “원청에서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문 위원장은 “하청업체에 줄 기성금 가운데 노동자 퇴직금을 원청에서 선공제 한 뒤 하청업체 퇴직연금 계좌에 적립하고 있는데, 원청이 퇴직연금 계좌가 깡통이 되는 것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회사 퇴직연금 계좌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4억3000만원에 그쳤고, 7월말에는 4000만원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 대표 박씨는 “요즘 하청업체가 어렵다보니 퇴직금을 충분히 적립해 놓은 곳은 한군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원청이 퇴직연금 적립을 강력하게 권유를 하고 행정적으로 지원해도 하청업체 대표들이 경영간섭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적립을 거부할 경우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의 자료를 보면, 지난달 말 기준으로 조선업 임금체불은 526억원, 1만1746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329억원(7345명)에 비해 59.8%나 증가했다. 조선업 밀집지역 노동·시민단체와 민주노총 등으로 구성된 조사팀이 지난 5~6월 동안 하청노동자(본공·물량팀 등)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32.0%, 물량팀 경우 51.8%가 임금체불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태욱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기성금 가운데 하도급 노동자들의 임금을 원청에서 별도 계좌(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한 뒤, 날짜가 되면 금융기관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제도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