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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적금 미루고 후원금 내던 20대 PD의 죽음

등록 2017-04-21 20:30수정 2017-04-21 21:22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황금비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withbee@hani.co.kr

고 이한빛(사망 당시 28살) 피디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많이 꼬여 있었어요. 이십대의 삶은. 항상 더 위로 올라오긴 했지만, 앞선 단계의 고민을 채 마무리하지 못한 도약이었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씨제이이앤엠(CJ E&M)의 피디가 됐지만, 정작 촬영 현장은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이 피디는 조연출로 일했던 드라마 <혼술남녀>(tvN)가 인기리에 종영한 다음날인 지난해 10월26일, “나를 버티게 했던 동력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니 남은 선택이 없네요”라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안녕하세요. 24시팀 황금비 기자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 이한빛 피디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마음 아파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첫 기사에 채 담지 못한 고인의 이야기와, 고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분투하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18일, 기자회견장 한가운데에 앉은 고인의 어머니 김혜영(59)씨는 줄곧 “한빛이는 참 착한 아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1월 씨제이이앤엠 피디로 입사한 고인은 첫 월급의 반으로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 경제력이 있으니까, 결혼 자금을 위해 적금을 들어라”라는 부모님에게 아들은 “돈 벌면 하고 싶은 게 있었다”며 “내년부터 적금을 들겠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들은 월급 대부분을 세월호 4·16연대, 케이티엑스(KTX) 해고승무원, 기륭전자 등에 후원금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첫 작품인 <혼술남녀> 조연출로 촬영에 돌입한 뒤, 시간이 갈수록 아들의 얼굴은 상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새벽에 들어온 아들과 겨우 함께 아침을 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혼술남녀> 마지막 촬영을 마친 10월21일 아들은 사라졌고, 닷새 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회사 쪽은 지난 6개월간 3차례의 서면 답변을 통해 “고인의 성격과 근무태만의 문제였다”고 주장했지만, 스태프들은 “근무환경 자체가 너무 열악했기 때문에 근무태만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고인의 휴대전화 통화기록과 촬영 스케줄을 토대로 확인한 결과, 고인이 촬영에 투입된 55일간 쉰 날은 고작 이틀, 하루에 3~4시간 쪽잠을 자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고 이한빛 피디의 씨제이이앤엠 인턴 시절 이름표.
고 이한빛 피디의 씨제이이앤엠 인턴 시절 이름표.

실제 씨제이이앤엠 제작부서의 노동 강도는 살인적인 수준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기업평가 및 구인구직 누리집인 ‘잡플래닛’에서 씨제이이앤엠 전·현직 직원들이 작성한 미디어·홍보부문 기업평가 184건 가운데, 57%에 해당하는 105건이 잦은 야근, 주말 출근 등 고된 노동 강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인간을 쥐어짜 성과를 냄’, ‘집에 갈 시간을 안 줌’, ‘개인의 삶은 포기. 일과 삶의 밸런스가 안 맞음’.

고인은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애초 절반 사전제작으로 계획됐던 <혼술남녀>는 촬영 초반 촬영·조명·장비팀 외주업체를 대거 교체했습니다. 고인의 아버지는 “비정규직의 애환을 모를 리 없는 아들이, 정규직 직원으로서 해고된 외주업체의 계약금을 환수하는 일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유족들의 기자회견이 있고 나서 방송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그제서야 씨제이이앤엠은 “지적된 문제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등 책임을 지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경찰과 공적인 관련 기관 등이 조사에 나선다면”이라는 조건을 달고서 말입니다.

씨제이이앤엠의 엔터테인먼트 채널인 <티브이엔>의 슬로건은, 역설적이게도 ‘즐거움엔 끝이 없다’입니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선 많은 신입 직원들이 ‘연차가 낮다’, ‘다 경험이다’라는 이유로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즐거움 뒤에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희생이 숨겨져 있는 걸까요. 이 글을 쓰고 있는 20일, 9급 공무원이었던 또 한명의 청년이 격무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보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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