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빌딩에서 이뤄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국제노동기준과 한국의 노동기본권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4일부터 나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은 한국 정부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첫 사무총장이다. 한국 대통령과의 공식 접견 역시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다. 정부가 라이더 사무총장을 초청하고, 대통령이 직접 접견한 것은 ‘노동존중사회’와 ‘사회적 대화’를 강조했던 정부의 정책목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더 사무총장은 4일 오후 한시간 남짓 이뤄진 <한겨레>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한국의 핵심협약 비준의 필요성과 함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국공무원노동조합 등 국제노동기준에 미달하는 노동기본권의 현실을 언급했다. 또 노동기본권의 완전한 보장이 임금주도성장과 ‘공정한 경제’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짚었다. 노동기본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해결이 바람직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과 한국 대통령의 공식 접견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떤 대화가 오갔나?
“매우 중요하고 고무적인 만남이었다. 문 대통령은 선거운동과 정책을 통해 노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국 정부의 경제성장정책·노동시장정책·노동기본권정책은 국제노동기구의 목표와도 가까운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확인했다. 나는 한국 정부가 목표를 향해 나가는 데 전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국제노동기구 8개 핵심협약 가운데, 4개를 아직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이에 관한 언급도 있었나?
“문 대통령은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4개 핵심협약 비준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협약 비준을 위해 필요한 입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나는 국제노동기구가 이에 대한 지원과 협조, 정책 조언을 하겠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가 이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무총장은 1997년 한국 노동계의 ‘노동법 날치기’ 철회 총파업 때, 국제노동계 대표단의 일원(라이더 사무총장은 당시 국제자유노련(ICFTU)의 제네바사무소장이었다)으로 방한한 적이 있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노-정관계는 대립적이었고, 대표단은 한국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아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노조와 정부간 대화가능성이 전무한 상황에서 대치중이었고, 한국은 노동기본권이 법적으로도, 관행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은 경제성장률이 6~7%인 역동적인 나라였는데 경제의 역동성을 노동기본권과 맞바꾼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주장은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 노동기본권의 완전한 보장이 한 나라의 경제·사회적 발전에 이롭다. 지속가능하고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의 여러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어떤 점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그때에 비해 많은 발전에 있었지만 아직도 한국에는 중대한 법적·관행적인 노동기본권 제한이 있어,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87호·98호(결사의 자유 협약)를 비준하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조금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가 핵심협약 비준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겠다고 선언했고, 국제노동기준을 적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부분에 있어 바라는 점은 노사정 대화가 항상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한국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이를 해결하길 바란다.”
-한국이 핵심협약을 비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노동기구 187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도 8개 핵심협약 모두를 비준하도록 할 의무가 있다. 핵심협약은 일터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 보편적 인권이다. 경제적 차원으로는 사용자와 노동자가 정당하게 몫을 나누기 위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이 보장돼야 한다. 8개 핵심협약은 공정한 경제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국제노동기구는 한국 정부에 많은 권고를 했지만 이행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국제노동기구는 국제노동기준에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서 한국 정부에 많은 권고를 해왔다. 결과가 100% 부정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면, 형법의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파업 참가자를 구속하는 문제, 교사·공무원의 기본권 문제, 단체교섭 문제(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단체교섭 시정명령 등) 등이다. 이를 한국 정부가 이행하지 못하는 데 법적인 문제와 정치적 도전이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이에 대해서 이해한다. 그래서 문 대통령을 만나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노동기구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사회적 대화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상태에 있다. 유엔(UN) 자의적 구금 실무그룹은 한 위원장을 즉각 석방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오늘 문 대통령과 한 얘기들이 법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그것과 더불어 개별 사건들도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문 대통령에게 밝혔다. 우리는 한 위원장의 상황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촉구하는 이야기를 한국 정부에 이미 여러차례 전한 바 있다. 국제노동기구가 유엔의 일부지만, 자의적구금 실무그룹의 결정 사항을 문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은 나의 의무는 아니다. 그 결정을 알고 있지만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자의적구금 실무그룹의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전교조·전국공무원노조 합법화 문제가 사회적 이슈다. 두 노조는 법외노조 상태다.
“교사와 공무원 노조에 대해서는 정부가 할 일이 명확해 보인다. 국제노동기구의 원칙에 따라서 합법화하고 정부의 개입 없이 운영될 수 있어야 하고, 규약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법률과 사법부의 판단도 국제노동기준에 맞게 노조의 자율성을 인정한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교사와 공무원은 다른 노동자와 다르지 않다.”
-국제노동기구는 ‘임금주도성장’을 주창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소득주도성장’을 목표로 삼고 있다. 임금주도성장·소득주도성장에서 ‘노동조합’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국민총소득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몫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노동자들의 몫이 기업으로 이전되고 있는 것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이는 불평등과 사회양극화를 유발하고, 수요가 창출되지 않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득주도성장 또는 임금주도성장이 중요하다. 원인은 기술발전·세계화 때문일 수도, 또 (노조 조직률 저하에 따른) 단체협약 적용률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것이 나아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정책들로는 최저임금, 재정정책, 조세정책 등이 있다. 한국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빌딩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1997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당시 <한겨레>가 방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 동판을 선물받고 기뻐하고 있다. 동판의 사진 속 맨 왼쪽이 라이더 사무총장이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부가 노조 조직률을 높이기 위한 정책적 수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문 대통령도 노조 조직률 하락 문제를 언급했다. 정부가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적 조처 외에도 사회적 분위기를 개선해 사용자가 노조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이는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노조가 전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게 해야 한다. 노조도 책임이 있다. 자신의 활동에 따라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둔 경험이 없다. 노사정을 대표하는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으로서 사회적 대화에 있어 중요한 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사회적 대화에 있어서 마법의 공식은 없다. 참여자들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할 일이 있고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때 가능하다. 오늘 오찬에서 노사정 대표를 만났는데, 사용자 단체는 일자리 창출, 기업 경쟁력 강화, 공정하고 균형 잡힌 사회에 관심이 있었고, 노동단체는 노동기본권의 문제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에 대해서 얘기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우선과제를 테이블에 놓고 일자리 창출, 청년실업 해결 등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대화해야 한다. 의지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신뢰가 있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국제노동기구가 100번째 생일을 맞는 2019년에 한국 정부가 핵심협약 비준을 선물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분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가능하다고 보는가?
“(웃으며) 가능하다. 노사정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문제다. 협약 비준 문제를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논의를 해야한다. 법 개정이 필요한 것은 맞는데 어떻게 할지에 대한 단일한 모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4개의 미비준 협약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공동의 목표로 삼아서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노사정 모두가 참여해서 논의하길 바란다.”
가이 라이더는…
가이 라이더(61)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은 2012년 10월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뒤 지난해 11월 재선돼 다음달부터 5년간의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영국 리버풀 출신으로, 영국 최대 노조상급단체인 노동조합회의(TUC)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해 국제노동기구 노동자국 국장, 국제자유노련(ICFTU) 사무총장,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 사무총장을 지내다 노동계 출신으론 처음으로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이 됐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97년 1월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 날치기’에 항의하는 총파업 당시 국제노동계 대표단 자격으로 방한했다. 당시 정부는 이들의 ‘반정부 언사’를 문제 삼아 공식 경고를 했고, 이에 따라 라이더 사무총장은 서둘러 귀국해야 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