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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역사 속 오늘] 다시 읽는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 편지’

등록 2017-11-13 10:40수정 2017-11-13 15:29

1970년 11월13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외치며 분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22살 청년은 근로기준법 책을 꼭 안은 채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며 외쳤다. 47년 전 오늘,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버들다리 위에서 숨진 전태일 이야기다.

그는 평화시장 피복공장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앞장섰다. 그의 이런 바람은 일기장과 누군가를 향한 수백 통의 편지들에 빼곡히 남아 있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편지를 쓰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부족을 경제개발로 메우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8년 5월1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 박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부족을 경제개발로 메우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8년 5월1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 박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1960년대 산업화가 본격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은 ‘산업역군’이라는 왜곡된 이름 아래 군사독재정권의 지독한 노동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군사 쿠데타로 잡은 정권에서 초고속 성장이라는 결과만큼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기에 적합한 수단은 없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 소자 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

전태일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편지를 썼다.

전태일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보내는 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전태일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보내는 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 (중략 )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 (중략 )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 (중략 )

전태일은 정부와 기업주를 향해 노동자들의 작업환경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반응뿐,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평화시장 실태조사를 하다

평화시장 등에 난립한 소규모 섬유제조업체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은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좁은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사진은 1960년대 다락방의 모습. 도서출판 <이매진> 제공.
평화시장 등에 난립한 소규모 섬유제조업체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은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좁은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사진은 1960년대 다락방의 모습. 도서출판 <이매진> 제공.
전태일은 자신이 일하고 있던 평화시장의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보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당시 열두세 살의 어린 소녀들은 일당 70원을 받으며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 꼬박 14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햇빛도 들지 않고, 환기시설 하나 갖추지 못한 열악한 환경은 이들을 병들게 했다.

전태일은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일방적인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던 노동자를 위해 평화시장 실태 조사에 나섰다.

전태일이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근무 환경과 임금 문제 등을 조사한 뒤 정리한 메모.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전태일이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근무 환경과 임금 문제 등을 조사한 뒤 정리한 메모.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1달 920시간중 372시간 휴일은 매달 첫주일과 삼주일 2일 . 국제 근로 기준의 2배에 해당하는 시간임 .”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각종 환자임 . 특히 신경성 위장병 , 신경통 , 루마티스가 대부분임 .”

“공임은 우리나라에서 여기보다 더 싼 데가 없음 . 경영주들은 서로 경쟁을 직공들의 공임에서 함 . 하루에 15시간을 작업하고도 1개월 급료가 10000원밖에 안됨 .”

근로감독관에게 편지로 진정서를 쓰다

전태일의 가족은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다. 그런 탓에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사치였다. 초등학교 4학년을 잠깐 다닌 것이 배움의 전부였던 전태일은 뒤늦게 ‘근로기준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에 대한 작업환경과 노동 실태 등을 조사해 파악한 뒤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서 형식의 편지를 쓴다.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 형식의 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왼쪽)와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 빈민구호활동을 했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1973년 7월에 찍은 평화시장 봉제공장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 형식의 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왼쪽)와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 빈민구호활동을 했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1973년 7월에 찍은 평화시장 봉제공장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 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 당하고 오직 고삐에 메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를 못합니다 .”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중략 )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중략 ) 이 모든 문제를 한시 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인간 전태일이 ‘진심으로 하고 싶어 했던 일’

전태일이 1970년 3월 7일 쓴 일기.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전태일이 1970년 3월 7일 쓴 일기.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하지만 전태일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일기를 보면 당시 정부의 대처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무엇을 --제품 계통에서 근로자를 위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일

누구와 --제품 계통에 종사하는 어린 기능공들과

언제 --1970년 . 음력 6월달 이전에

어디서 -- 서울평화시장에서

이 일을 하려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

▲ 1969년 4월달부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이 문제는 1968년 12월달에 착상한 것이다 . 나 자신이 꼭 해야 될 문제로 생각했다 .

▲그러나 1969년 서울특별시 근로감독관실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심사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

-1970년 3월 7일 일기 -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삶을 그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삶을 그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보며 법을 공부했다. 마침내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함께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한다. 조직을 통해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노동조건의 부당성을 알리는 일에 앞장선다.

하지만 경제 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당시 군사독재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도 쫓겨나 공사장을 전전해야 했다.

전태일이 당시 평화시장 실태조사를 위해 돌렸던 설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왼쪽)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열악한 노동환경. <한겨레>자료사진
전태일이 당시 평화시장 실태조사를 위해 돌렸던 설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왼쪽)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열악한 노동환경. <한겨레>자료사진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다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켜 ‘삼동 친목회’로 이름을 바꾼다.

전태일은 설문지를 만들어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실태를 조사한다.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노동청에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평화시장 사업주 대표들을 상대로는 임금과 노동시간·환경 등을 개선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70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 보도.
1970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 보도.
이런 내용이 <경향신문>에 보도되자, 군사독재정부는 그 동안의 태도를 바꿔 노동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 약속은 매번 지켜지지 않았다.

정부에 화가 난 ‘삼동 친목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주변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 행사를 준비했다. 평화시장 사업주들은 다른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 ‘삼동 친목회’ 시위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경찰은 이들이 준비한 플래카드를 빼앗고 시위를 방해했다.

전태일의 일기장(왼쪽)과 그가 남긴 메모.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전태일의 일기장(왼쪽)과 그가 남긴 메모.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그 순간 전태일은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그는 온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설립되었고, 1970년대에만 전국에서 약 2500개의 노동조합이 생겼다. 또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혹독하기만 했던 노동자들의 노동환경도 조금이나마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전태일 재단 공식 누리집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전태일

월간 ' 박정희 ' 창간특집호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이병천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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