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한국노총 대한법률구조공단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경북 김천 본부 앞에서 총파업 출정식을 열고 이헌 이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노동조합 제공
법무부 산하 공공기관인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일반직 3급 이상 간부들과 팀장급 전원이 공개적으로 이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공공기관의 보직 간부들이 기관장의 사퇴를 요구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13일 <한겨레>가 입수한 ‘이사장 사퇴요구서’는 공단의 일반직 3급 이상 간부 25명 전원의 명의로 쓰였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전면 파업 등 극단적 위기 상황을 해결하고 취약계층에 대한 법률 서비스 제공이라는 공단 본연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전제 조건은 이헌 현 이사장의 사퇴 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 9일 서울에서 모임을 가진 뒤, 이사장에게 사퇴요구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2일에는 일반직 4급 팀장 38명도 “서민법률복지증진이라는 본래의 사명에 매진할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현 이사장 체제는 한계가 노정됐으니 자리에서 물러나 달라”며 사퇴요구서와 함께 자신들의 보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번 사태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창립 30년 만에 처음으로 벌어진 노조의 파업에서 촉발됐다. 공단은 일반직 620여명, 변호사직 100여명, 공익법무관 17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일반직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올초부터 진행된 단체교섭 과정에서 “변호사 직군과의 성과급·보직 차별을 철폐하라”고 주장했고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 절차를 거쳐 지난달 22일부터 전면·부분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단 쪽은 ‘불법파업’이라며 노동조합을 상대로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법원이 이를 기각했다. 노조 관계자는 “이 이사장이 실질적인 법률상담·조력 업무를 하는 일반직원들을 무시하며 변호사와 일반직렬 간의 갈등을 키웠고, 정당한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간부들까지 이 이사장의 리더십·조직운영 방식 등을 문제 삼아 퇴진요구에 동참한 것이다. 공단 간부 ㄱ씨는 “이사장 사퇴요구는 노조 파업 등 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충정일 뿐, 노조의 요구와 쟁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이 이사장이 취임 뒤 독단적·즉흥적이며 비상식적인 조직운영을 해 왔다. 조직 내 폐단이 쌓여 사퇴요구에 이르게 됐다”고 전했다.
반면 이 이사장은 간부들에게 사퇴요구에 응할 뜻이 없다며 “(이사장에 대한) 신뢰와 복종의 내용이 담긴 경위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지만, 이에 응한 간부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ㄱ씨는 “애초 간부들이 모였던 취지는 이사장에게 ‘건의’를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간 쌓인 불만들이 촉발되면서 ‘사퇴 요구서’로 수위가 높아졌다”며 “요구를 철회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한겨레>와 통화에서 “노조와 간부들이 내가 왜 그만둬야 하는지에 대해 타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고 있다”며 “부당한 노조의 요구에 간부들이 동조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퇴할 뜻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보수성향 변호사단체인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대표 출신으로, 2015년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추천으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그해 11월 “세월호특조위가 박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조사를 개시하면 위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바 있는데, 이 기자회견 당일 해양수산부가 작성한 “브이아이피(VIP·대통령을 지칭) 조사 땐 위원직 사퇴”라는 시나리오가 포함된 문건이 공개되면서 해양수산부와 정부의 지침에 따라 특조위 위원들이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이 이사장은 이후 특조위의 직원·파견공무원과 갈등을 겪다 2016년 2월 “특조위가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며 부위원장직에서 사퇴한 뒤 석달 만에 5월 법무부 장관이 임명하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인 2016년 12월엔 현직 기관장 신분으로 “세월호 7시간이 탄핵소추안에 포함된 것은 매우 부적합한 일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법적 책임이 없다”며 박 전 대통령을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에 비유한 글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