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왼쪽부터), 김지형 조정위원장,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협약서를 들고 악수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노동자 혼자서 회사의 안전보건을 살펴보고 다른 의견을 내긴 어렵습니다. 노동조합이 탄압받는 회사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삼성은 국내외(와) 해외에서 노동조합을 탄압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사과하고 노동조합 할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비뚤배뚤한 글씨가 담은 뜻은 정연했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대표이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63)씨는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와 반올림 사이의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기에 앞서 직접 손으로 쓴 원고를 공개했다. 이날 삼성과 반올림은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의 중재안을 이행하겠단 내용의 협약서에 서명했다. 11년을 끌어온 ‘삼성 백혈병 사태’가 마무리된 것이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반도체 3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딸 유미(사망 당시 22살)씨가 숨지고 11년, 강원도 속초의 평범한 택시기사였던 황씨는 그간 거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처연하게 싸워왔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는 이날 백혈병 등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황씨는 이 사과를 다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오늘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는 솔직히 직업병 피해 가족들에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11년간 반올림 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속고 모욕당했던 일이나 직업병의 고통,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생각하면 사실 그 어떤 사과도 충분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사과를 삼성전자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1년을 싸우는 동안 그는 산업안전보건 분야 전문가 수준이 됐다. 그의 품엔 황망하게 세상을 등진 유미씨뿐 아니라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세상의 많은 노동자들이 안겼다. “삼성의 다른 계열사에서도 유해물질을 사용하다가 병든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사업장에서도 비슷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삼성은 이 모든 직업병 노동자들을 위한 폭넓은 보상을 마련하길 바랍니다.”
황씨는 딸 유미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우리 노동 현장의 안전 환경과 산재 노동자 보호 제도가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애초 정부의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지 않았다면 우리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근로복지공단은 많은 산재 노동자에게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제는 산재보험 제도와 근로복지공단을 개혁해서 산재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에서는 사업주의 잘못을 철저히 조사해서 형사처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직업병 보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입니다. 노동자가 무슨 화학물질을 쓰는지 알 수 있게 노동자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알권리, 참여할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날 삼성전자는 사태 재발방지와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500억원의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했다. 이 돈은 전자산업안전보건센터 건립 등 안전보건 연구개발과 기술지원서비스를 위한 인프라 구축 등 산재예방 사업에 쓰인다. 피해자 지원보상 업무는 ’법무법인 지평’이 맡고, 지원보상위원회 위원장은 조정위원회의 김지형 위원장이 맡기로 했다. 향후 합의이행 업무는 법무법인 지평과 지원보상위원회로 넘어간다.
황씨는 지난 7월 조정위의 중재방식에 대해 합의하는 서명식 자리에선 소감을 밝히다 눈물을 흘렸다. 당시 조정위는 기존 조정 방식으론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양쪽이 조정위가 제시하는 중재안을 조건 없이 수용하는 것을 사전에 합의하고 조정안은 나중에 내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를 삼성전자와 반올림 양쪽이 받아들이면서 사태 해결의 물꼬가 트였다.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난 이날 협약식에서 황씨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속으로 어떤 다짐을 스스로 하듯 인사말을 하는 동안 내내 옅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제 딸 유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하지만 유미와 제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있을(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이 이런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오늘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만들어질 지원보상위원회와 발전기금을 통해 진행될 사업들에 임하는 모든 분들께서 이점을 꼭 기억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박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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