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농성 409일을 맞은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왼쪽)과 박준호 사무국장이 25일 오후 서울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굴뚝 농성장에서 시민들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든 채 손을 흔들고 있다. 강창광 기자 shang@hani.co.kr
성탄절인 25일 두 노동자가 ‘서글픈’ 세계 기록을 세웠다.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소속 홍기탁(45) 전 지회장과 박준호(45) 사무국장이 기록의 주인공이다. 이날로 굴뚝 농성 409일을 맞은 이들은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을 경신했다.
두 사람은 천막 제조회사 파인텍의 모회사인 스타플렉스가 노조와 약속한 고용승계, 노동조합 및 단체협약 보장을 요구하며 지난해 11월12일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 올랐다. 높은 굴뚝 위 좁은 공간에 얼기설기 마련한 천막에서 벌써 두번째 겨울을 맞는 셈이다.
이들이 갈아치운 직전 기록을 세운 이는 같은 회사에 소속된 차광호 현 파인텍지회장이다. 차 지회장은 스타플렉스의 정리해고에 반발해 2014년 5월27일부터 408일간 경북 구미산업단지 공장 안 45m 굴뚝에 오른 바 있다. 당시 차 지회장은 408일의 고공농성 끝에 모회사인 스타플렉스로부터 ‘고용을 승계하고 해고자복직투쟁위가 꾸린 노조와 단체협약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후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회사의 약속을 받아내는 데 408일이 걸렸고, 이번엔 그 약속을 지키라고 409일째 고공농성을 하는 기막힌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홍 전 지회장 등의 고공농성이 장기화하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종교인 등은 ‘굴뚝 농성 중인 조합원들이 408일을 넘기지 않고 내려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사쪽은 기존 고공농성 기록이 깨지는 이날까지도 문제 해결을 외면했다.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박준호 사무국장(왼쪽)과 홍기탁 전 지회장이 25일 오후 굴뚝 위로 올라온 나승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한테서 아기예수 조각품을 받고 있다. 스타플렉스(파인텍)공동행동 제공
한국 사회가 ‘서글픈 기록’을 세운 25일, 굴뚝 위 두 노동자는 긴급 건강검진을 받았다. 이날 오후 2시27분께 최규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의사, 심희준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한의사 등 의료진 2명과 이동환 목사, 나승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가 굴뚝 위로 올라갔다. 오후 3시부터 50여분간 두 사람의 몸 상태를 살핀 의사 최씨는 “두 사람 겉옷을 올리자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뼈밖에 안 남아 있었다. 심장 소리가 불안정하고 혈압·혈당 모두 100 이하로 너무 낮다”며 크게 우려했다. 지난 9월30일 건강검진 때 홍 전 지회장의 몸무게는 59㎏, 박준호 사무국장의 몸무게는 49㎏으로, 농성 전보다 6~7㎏가량 살이 빠진 상태였다. 당시에도 “체중 감소가 크고 근육도 계속 빠져나가 찬 바람을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우려가 있었는데 최씨는 이번 검진에서 두 사람 모두 농성 전보다 10㎏ 정도 빠진 것으로 추정했다.
“싸움 길어질 걸 알고 올라왔지만…” 두번째 겨울맞이 ‘참담’
한의사 심희준씨는 “굴뚝 농성장 가로 폭이 1m 정도로 두명이 서로 마주 보거나 자려고 누웠을 때 다리를 다 펼 수도 없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 장기간 생활한 탓에 박 사무국장은 허리 통증을 많이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 전 지회장은 24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바람이 부는 굴뚝 위는 항상 흔들린다. 또 좁은 공간에 머물다 보니 관절, 허리, 무릎 등 성한 데가 없다”고 토로했다.
한파도 큰 걱정거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굴뚝 위에서 현재 두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온기는 핫팩이다. 이날 굴뚝에 오른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기존의 얇은 천막 위에 비닐 천막을 덧댔지만 농성장 안으로 들어오는 겨울 삭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라고 한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천막 안에서 두 사람은 패딩을 입고도 담요를 두른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건강검진이 끝난 뒤 오후 3시50분부터 굴뚝 위에서는 작은 기도회가 열렸다. 목사 이동환씨는 “기쁜 소식을 나눠야 하는 성탄에 참담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를 올린다”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다. 이 목사는 “이곳은 75m 높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현실의 벽은 75m 굴뚝보다 높아 보이지만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겠다”며 홍 전 지회장과 박 사무국장의 건강을 빌었다. 천막 안에서 열린 기도회였지만 이 목사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계속해서 나왔다.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국장의 굴뚝농성이 25일로 409일을 맞았다. 성탄절인 이날 오후 시민들이 서울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농성장을 찾아 굴뚝 위 두 농성자들에게 전할 쿠키를 김옥배(오른쪽) 조합원에게 건네고 있다. 강창광 기자 shang@hani.co.kr
굴뚝 아래에서도 시민 30여명이 전화로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기도회에 동참했다. 시민들은 굴뚝 위를 향해 “홍기탁 힘내자! 박준호 힘내자! 우리가 함께할게!”라고 외쳤다. 홍 전 지회장과 박 사무국장은 이들이 보낸 쿠키 등 선물을 든 채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이날 저녁에는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농성장을 찾기도 했다. 김씨는 박준호 사무국장과 한 통화에서 “힘들게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 나도 끝까지 싸울 테니까 함께하자”고 말했다.
굴뚝 아래 사람 중엔 연대 단식농성을 하는 이도 있다. 앞서 408일의 고공농성을 했던 차 지회장은 지난 10일부터 보름째 단식 중이다. 지난 18일에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나승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박승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등이 무기한 연대 단식에 돌입했다. 성탄절 전날인 24일 저녁에는 ‘파인텍 하루조합원 4080인 실천선언’이 열려, 참가자들은 저녁 한끼를 단식하고 그 밥값 5천원을 농성자들의 투쟁 기금으로 후원했다. 차 지회장은 “(과거) 408일을 굴뚝에 있다가 내려오니 공황장애가 생겼고 (3년이 지난) 지금도 치료가 안 된다”며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내려올 수 있도록 단식을 시작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으니 참담하다”고 했다.
굴뚝 아래 단식자의 참담함을 위로하듯, 굴뚝 위 농성자는 굳건했다. 홍기탁 전 지회장은 409일을 맞는 소회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슬픈 현실이죠. 409일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찾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섯명에 불과한 작은 사업장의 투쟁에 많은 분들의 힘이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는 거죠.”
함께했던 이들이 지쳐 떠나고 이제 노조에 5명만 남은 게 현실이지만, 그는 좀처럼 좌절할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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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서 임재우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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