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 위원들이 28일 동아일보 본사 앞에서 ‘75년 동아 사태’ 진상 규명과 사죄를 요구하며 12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김경호기자jijae@han.co.kr
유신에 맞서다 해직된 기자들…격려광고로 탄압 맞선 시민들
다음달 1일 ‘자유언론 문화제’…“과거사위 31년전 진상 밝혀야”
‘자랑’ 일삼던 동아일보는 침묵
다음달 1일 ‘자유언론 문화제’…“과거사위 31년전 진상 밝혀야”
‘자랑’ 일삼던 동아일보는 침묵
〈동아일보〉가 해직 언론인들의 언론 자유 운동을 ‘일부 과격 기자들의 제작 방해 행위’로 매도한 75년 3월17일치 1면 사고(아래 왼쪽)와 동아 사태를 자랑스런 역사로 기록한 80년 4월1일치 창간 60주년 기념 특집기사.(오른쪽)
매서운 꽃샘바람이 불던 28일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 열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다섯평 남짓한 천막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지난 17일부터 시작한 농성은 이날로 12일째를 맞았다. 이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위원장 문영희) 출신 해직 언론인이다. 1975년 3월17일 새벽,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선 134명의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피디, 아나운서들은 차가운 거리로 쫓겨났다. 지금은 누렇게 빛이 바랜 그날치 석간 동아일보 1면에는 ‘동아일보 사원일동’ 이름으로 ‘국민여러분께 거듭 아룁니다’라는 사고가 실려 있다. 사고는 “일부 과격한 기자들의 제작방해 행위로 본의 아니게 신문과 방송을 비상제작할 수밖에 없었음을 깊이 사과 드린다”고 말하고 있다. 이날 석간을 본 해직 기자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들은 74년 10월24일 ‘언론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강력히 배제한다’는 등 3개항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선포하고 언론 자유 운동에 앞장섰다.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다른 신문과 방송들이 언론 민주화 목소리를 내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를 도화선으로 시민사회의 민주화 운동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박정희 독재정권은 전대미문의 광고탄압이라는 칼을 휘둘렀다. 74년 12월16일부터 동아일보 광고주들은 하나 둘 광고를 철회하기 시작했고, 그해 12월25일에는 광고가 완전히 끊겼다. 동아투위 기자들이 회사에서 쫓겨나자, 제약회사 광고를 시작으로 슬그머니 광고가 정상화됐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서울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던 1980년. 동아일보는 4월1일치 창간 60주년 기념 특집기사에서 유신 때의 광고 탄압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아일보가 독재정권 전횡을 비판한 결과”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언론탄압에 맞서 싸우다 회사에서 강제 해직된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 세월, 까맣던 그들의 머리카락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고 정론직필을 지켜왔던 손은 고된 삶의 무게만큼 거친 주름이 잡혔다. 당시 서른 살로 해직 언론인 가운데 막내 기수들이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12명의 동료들은 진실 규명을 보지도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창간기념일인 새달 1일을 맞아 ‘자유언론 촛불 문화제’를 연다. 이날은 75년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냈던 ‘시민 광고주’들도 초청한다. 동아일보를 살리고자 격려광고를 냈던 시민 광고주들은 해직 언론인들과 마찬가지로 광고 탄압과 언론인 강제 해직의 진상 규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취지에서다. 동아투위는 이날 행사 참가자들의 뜻을 모아 동아일보사에 격려 광고 성금의 반환도 요구할 계획이다. 동아투위 위원인 이부영 전 국회의원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광고 탄압과 언론인 해직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정부는 국정원 과거사위를 통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권력과 야합해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의지를 짓밟은 동아일보 사주 역시 사과를 통해 옛날의 동아일보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 경영전략실 관계자는 동아투위의 요구에 대해 “노 코멘트”라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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