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 못벗어난 덩아무개, 신정아 보도
본질보다 개인 사생활에 집착
“사적 영역 상품화로 인권 침해”
“사적 영역 상품화로 인권 침해”
여성의 성이 개입된 이슈를 다룰 때마다 언론은 유혹에 빠진다. ‘상하이 외교관 정보유출 사건’과 ‘신정아씨 자서전 폭로’ 보도에서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선정적 이슈의 상업적 활용’이란 유혹 앞에서 길을 잃은 언론은 사안의 ‘본질’보다 사생활이란 ‘껍질’에 집착하려는 유혹에서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상하이 주재 외교관들로부터 여러 정보를 빼낸 덩아무개씨와 2007년 학력 위조사건 당사자인 신정아씨의 자서전 출간을 두고 언론이 보인 반응은 ‘무조건 반사’와도 같았다. ‘여성’과 ‘성 스캔들’이란 교집합 앞에서 자연 반응하는 언론의 ‘관음증적 시선’은 두 사안을 관통하는 공통의 보도 태도였다.
상하이 외교관 정보유출 사건에선 언론 보도가 사건의 핵심을 파헤치기보다 오히려 은폐하는 현상이 적나라하게 관찰된다. 대부분의 언론이 문제를 일으킨 한국 외교관과 허술한 외교 시스템을 제쳐두고 ‘묘령의 여인’ 덩씨에게 현미경을 들이댔다. ‘상하이 마타하리’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며 미인계를 활용한 스파이 사건(25일 정부 조사 결과는 ‘단순 공직기강 해이’)으로 몰아가는가 하면, 덩샤오핑 및 시진핑(중국 국가부주석)과의 관계를 둘러싼 추측 기사도 난무했다. 정작 문제를 일으킨 한국 남성 외교관들 이름과 얼굴은 익명과 모자이크로 처리하고 덩씨의 실명과 얼굴은 ‘알몸’처럼 노출시킨 데선 한국 언론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적 시선’이 반영됐다는 지적이다. 덩씨가 보도의 타당성을 놓고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운 ‘외국 여성’이란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일보>는 9일치 1면 머리기사를 ‘한국판 색계’란 제목을 달아 덩씨의 사진과 함께 내보냈다. <조선일보> 11일치 2면 기사(‘그녀의 비엠더블유엔 특수 번호판, 그녀는 중 공안에 굵은 동아줄 있었다’)엔 ‘그녀의 두 얼굴-애교 철철 넘치다가 수틀리면 맹수로 돌변’이란 소제목이 붙었다. <문화일보> 9일치 3면 기사는 특히 노골적이다. ‘그녀의 치파오(중 전통 여성복) 속으로 한국 정보 줄줄 흘러들어갔다’는 제목 아래 치마 속 다리가 훤히 드러난 여성 사진이 함께 편집됐다. 언론의 주된 관심이 한국의 부끄러운 외교현실이 아닌 덩씨를 사이에 둔 ‘치정’과 ‘성 스캔들’임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이다.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은 “언론이 한 여자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사건의 본질인 외교관의 문제는 도리어 감춰지고 말았다”고 평했다. 결국 사건 제보자였던 덩씨의 남편이 ‘공직기강 잡아달랬더니 (덩씨를) 꽃뱀으로 몰고 갔다’(조선일보 11일치)고 항변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적 영역에 흥분하는 언론의 모습은 ‘신정아 자서전 보도’에서도 재현됐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신씨의 일방적 폭로를 딴 선정적 제목들이 신문 곳곳에 등장했다. ‘“늘 밤에 연락…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동아일보 23일치 10면), ‘“정운찬씨가 밤늦게 호텔 바에서 만나자고…”, 신정아 자전 에세이서 폭로 파문’(국민일보 23일치 1면), ‘“정운찬, 교수직 제의…계속 지분거려”’(경향신문 23일치 2면) 같은 표현들이 쏟아졌다. <헤럴드경제> 인터넷판에선 아예 ‘긴급’이란 타이틀을 붙인 ‘정운찬 전 총리가 호텔로 불러내…’(포털 노출 제목)란 기사가 떴다. 3년 전 언론 기사로 사생활이 발가벗겨진 신씨가 자서전 출간에 맞춰 언론의 보도 메커니즘을 역이용하고, 언론이 신씨 주장을 재활용해 자극적 보도를 남발하는 형국이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사무처장은 “언론이 알권리 차원에서 중요 이슈를 보도해야 하지만 ‘알권리’와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는 다르다”며 “언론이 사적 영역을 상품화해 기사를 쓰면 개인의 인권은 저 멀리 사라진다”고 말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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