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오른쪽)과 성한표 전 <한겨레> 논설주간이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나 <한겨레> 창간 25돌과 한국 언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원로 언론인들에게 신문의 미래를 묻다
‘미디어 생태계’가 급변하는 뉴미디어, 다매체 시대에 전통 미디어인 신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신문의 위기는 그 자체의 위기로 끝나지 않고 저널리즘 전체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문화적 퇴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겨레>는 창간 25돌을 맞아 신문의 역할과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 남재희(79) 전 노동부 장관(전 <서울신문> 주필)과 성한표(71) 전 <한겨레> 논설주간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은 4월3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사회 <한겨레>창간 25돌을 맞아, 미디어 생태계가 급변하는 가운데 언론의 역할과 미래에 대한 고언을 듣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먼저 <한겨레>창간 때의 소회와 새 신문 창간으로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듣고 싶다.
남재희 전 장관(이하 남) <한겨레>창간 주역들과 두루 친해서 당시 양평동 사옥에 자주 찾아갔다. 무엇보다 ‘국민주’ 방식으로 신문을 만들었다는 것과 언론 자유가 억압받던 상태에서 새로운 신문을 만든다는 것이 합쳐져 큰 충격과 감동을 줬다. 그때 <한겨레>는 ‘민주·민족·통일’을 내세웠는데, 이 가운데 ‘민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다만 ‘민족’과 ‘통일’이란 명제는 그때와 지금의 의미가 크게 다르다고 본다.
한겨레’ 창간의 의미
남 “국민주는 충격과 감동보수신문들과 차별성 보여줘”
성 “초창기 언론·사회 이끌어좀더 ‘센’ 기사 나왔으면” 성한표 전 주간(이하 성) 통일이나 민족에 대해 감상적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태도도 지금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무엇인가를 ‘함께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로 민족·통일 이야기가 꽉 막혀 있다가 막 쏟아져나올 때였다. 남 일각에선 <한겨레>의 창간 25돌을 말하면서 ‘소시민화’했다고도 평가를 했다.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것을 ‘세기적 변화’라고 하고, 베를린 장벽 붕괴 앞뒤 시기를 다르게 본다. ‘소시민화’ 평가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본다. 이전에 쓰던 개념들이 희석돼 명확하게 쓰일 수 없기 때문에 변화에 대해 ‘소시민화’ 같은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변화가 좋다고 본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까지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상이 혼란스럽고 모호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어떤 국가상을 추구할지에 대해 상당히 합의점을 찾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때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가 공통적으로 제기된 것이 이런 맥락 위에 있다. 지금 <한겨레>가 지면을 만드는 방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성 <한겨레>는 초창기 언론계와 우리 사회 전체를 끌고 나아간 측면이 있다. 한글 가로쓰기, 컴퓨터 조판의 도입을 비롯해 촌지 안 받기, 북괴 대신 북한으로 용어 바꾸기 등에도 앞장섰고, 다른 신문들이 이런 흐름을 다 따라왔다. 또 당시 <한겨레>분위기에는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활력이 있었다. 기자들은 걸핏하면 국장 앞에 늘어서서 ‘신문을 똑바로 만들라’고 성명을 발표하곤 했다. 초기에 뿌리를 내리게 만든 ‘야성’이 있었다. 그런 야성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이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야성 자체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여러 시각이 가능하다. 남 요즘도 <한겨레>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해주는 데에 변함없이 다른 신문에 견줘 차별성이 있어서 좋다.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약자를 위해 노력하는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성 그렇다. 다만 간혹 죄지은 사람들이나 무리하게 자기 욕심 채우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센’ 기사들이 나와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보수 신문들과의 강한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 아까 말했듯 지향하는 국가상이 동질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차별화하긴 쉽지 않다. 사회의 이상향이나 이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부정과 부당함에 대한 저항에서 보수 신문들과 현격한 차이를 내보여야 한다. 성 동감한다. 차별화한다고 해서 이념적 성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이나 잘못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강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 한국의 언론 현실을 평가한다면?
남 언론인 천관우(전 <동아일보>주필)씨와 송건호(전 <동아일보>편집국장·<한겨레>초대 사장)씨의 언론관을 각각 ‘광장론’과 ‘현상 타파론’이라고 이름 붙여 비교해본 적이 있다. 천관우씨는 언론의 자유가 이뤄지는 광장만 마련되면 모든 게 다 잘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송건호씨는 자유라는 이름 아래 “개미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서 돌 뿐이고 현실엔 큰 변화가 없는 것을 주목했다. 언론이 나서서 그런 것을 깨부수고 새로운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현재 봉건적·전근대적으로 부정부패와 같은 것들이 악순환 구조로 고착되고 있다. 특히 정치, 경제, 언론, 학계, 관계 등이 하나의 ‘복합체’를 이뤄 그 피해가 극심하다. 언론은 이런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깨기 위해 전투적이고 투쟁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 앞서 말했던 ‘야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가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특히 언론사마저 권력기관들이 모인 복합체에 포함되어 있고, 소수의 언론사를 제외하면 모두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언론 저널리즘의 위기
남 “자본주의서 신방겸영 불가피여론 흔들어도 ‘팩트’ 힘 못 이겨”
성 “종편이 기득권층 대변 강화서민삶 담아 여론다양성 지켜야”
사회 일부 신문사들이 종합편성채널에 진출해 신문·방송을 교차 소유함에 따라 여론 다양성 훼손 등 미디어 생태계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하는 시각이 많다.
남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복합체 언론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어찌할 순 없다. <한겨레>의 경우엔 그런 상업 언론이 아니라 ‘오피니언 페이퍼’로서 고급 독자들을 위한 신문이 돼야 할 것이다. 기득권 언론들이 몸집을 키워서 ‘언론 장악’에 대한 우려가 나오지만, 설령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더라도 ‘팩트’만은 마음대로 장악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그렇게 비관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구약성서에 보면, 금·은·동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우상이 쇠와 진흙으로만 된 발에 돌을 맞아 가루가 되어버린다는 얘기가 나온다. 위기가 닥치면 소수의 의견이라도 진실에 가까운 의견이 더 신뢰받는다.
성 지난 총선·대선 치르면서 여론 다양성의 침해가 더욱 잘 드러났다. 대선 때 지상파 방송에서는 드라마나 연예 프로그램만 나오는 반면, 종편에서는 끊임없이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틀어댔다. 기득권 세력의 복합체에 종편이라는 선전 도구가 강화된 상황이다. 물론 선거 때 인터넷 언론이나 소셜미디어 등이 맞바람을 일으켜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히기도 했다. 종편이 지난 대선 때 영향력을 발휘했다지만 앞으로 경영이 계속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사회 종이신문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남 상당히 비관적이다. 부수 늘리려고 허둥지둥하다간 정체성 상실이 온다. 국외의 주요 신문사들은 온-오프 통합 추세로 가고 있다. 종이신문이 궁극적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쉽사리 예측하긴 어렵다. <한겨레>처럼 문화사적 흐름을 잘 짚고 있는 신문의 구실이 중요하다.
성 인터넷 언론이나 시민 저널리즘, 소셜미디어와 같은 매체들은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에 견줘 신문사는 편집 쪽에 상당히 수준 높은 인력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따라서 이 인력들을 제대로 활용해 고품질의 신문을 만들어내면 경쟁력과 미래가 있다고 본다. 노동자·서민의 삶 현장의 밑바닥까지 깊이 들어가는 심층 취재를 담고, 전문가적인 관점으로 풀이를 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신문이다. 판매 부수가 늘어 경영이 좋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문의 사회적 기능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차원이다.
사회 지난 정권 때 ‘언론 장악’ 시도가 있었고, 저널리즘의 위기도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다.
성 언론 장악을 위해 권력기관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동원됐고, 결과적으로 5년을 그렇게 살아오면서 기본적인 것들이 많이 파괴됐다. 저널리즘은 기본적으로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들은 자기들의 논조에 따라 사실(팩트) 자체를 뛰어넘어 버린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이런 행태가 많이 드러난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보도만 봐도, 아직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언론들이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으로 단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실 확인부터 하자’는 주장은 모두 ‘종북좌파’로 매도당하게 됐다. 얼마 전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해서도 일부 언론들이 사실 확인보다 ‘여직원 감금’이란 프레임을 들고나왔는데, 이런 데에서 저널리즘의 위기를 본다.
남 예전엔 ‘빨갱이’라고 하더니, 요새는 ‘종북’이라는 모호한 것이 진짜 사람 잡는 말이 되었다. 마술방망이처럼 여기저기 갖다 붙이며 낙인찍고 있다. 이런 용어부터 깨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언론정책
남 “박정희 전 대통령 ‘3선개헌’ 전유연했던 언론자유 기억하길”
성 “MB정권 해직언론인 복귀청와대가 나서서 정상화해야”
사회 박근혜 정부 언론정책에 대한 전망은?
남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전까지는 비교적 언론 자유가 허용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시기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 청와대에선 언론에 대해 “간여 안 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러긴 힘들 것이라고 본다. 어떤 방식으로든 매체들을 자기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할 것이다.
남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현안에 대해 지금처럼 아마추어리즘을 계속 보이면, 여권도 제대로 컨트롤 못 하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다. 최근 남북관계를 다루는 것도 그렇고, 경제민주화 논의가 실종된 것도 이런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서투르게 가다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노사관계에선 해직자를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
성 지난 정권 때 해직언론인들이 양산됐는데, 원직으로 복귀돼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방송 정상화’가 안 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복귀가 돼야 하는데 안 되고 있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청와대나 여당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회 마지막으로 언론계 전체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달라.
남 신문들이 너무 부수에 신경쓰지 말고 전문성 강화와 사회적 구실을 계속하는 길을 찾아갔으면 한다.
성 신문이든 방송이든 기자들이 자신이 처한 현장에서 저널리스트라는 철저한 의식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과 책임감을 갖고 일했으면 좋겠다.
사회 문현숙 선임기자,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단독] “박원순 시장 영향력 차단”‘ 국정원 추정 문건’ 나왔다
■ 주진우 구속영장 기각…법원 “언론자유 한계 다투는 사건”
■ 대기업 인사팀, 취업특강서 여대생 외모지적 등 ‘갑질’
■ 치매 아내 4년 돌보던 80대 끝내…“이 길이 가장 행복” 마지막 동행
■ 미 경찰 “윤창중, ‘중범죄’로 다루지 않고 있다”
성 “초창기 언론·사회 이끌어좀더 ‘센’ 기사 나왔으면” 성한표 전 주간(이하 성) 통일이나 민족에 대해 감상적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태도도 지금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무엇인가를 ‘함께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로 민족·통일 이야기가 꽉 막혀 있다가 막 쏟아져나올 때였다. 남 일각에선 <한겨레>의 창간 25돌을 말하면서 ‘소시민화’했다고도 평가를 했다.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것을 ‘세기적 변화’라고 하고, 베를린 장벽 붕괴 앞뒤 시기를 다르게 본다. ‘소시민화’ 평가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본다. 이전에 쓰던 개념들이 희석돼 명확하게 쓰일 수 없기 때문에 변화에 대해 ‘소시민화’ 같은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변화가 좋다고 본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까지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상이 혼란스럽고 모호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어떤 국가상을 추구할지에 대해 상당히 합의점을 찾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때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가 공통적으로 제기된 것이 이런 맥락 위에 있다. 지금 <한겨레>가 지면을 만드는 방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성 <한겨레>는 초창기 언론계와 우리 사회 전체를 끌고 나아간 측면이 있다. 한글 가로쓰기, 컴퓨터 조판의 도입을 비롯해 촌지 안 받기, 북괴 대신 북한으로 용어 바꾸기 등에도 앞장섰고, 다른 신문들이 이런 흐름을 다 따라왔다. 또 당시 <한겨레>분위기에는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활력이 있었다. 기자들은 걸핏하면 국장 앞에 늘어서서 ‘신문을 똑바로 만들라’고 성명을 발표하곤 했다. 초기에 뿌리를 내리게 만든 ‘야성’이 있었다. 그런 야성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이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야성 자체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여러 시각이 가능하다. 남 요즘도 <한겨레>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해주는 데에 변함없이 다른 신문에 견줘 차별성이 있어서 좋다.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약자를 위해 노력하는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성 그렇다. 다만 간혹 죄지은 사람들이나 무리하게 자기 욕심 채우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센’ 기사들이 나와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보수 신문들과의 강한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 아까 말했듯 지향하는 국가상이 동질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차별화하긴 쉽지 않다. 사회의 이상향이나 이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부정과 부당함에 대한 저항에서 보수 신문들과 현격한 차이를 내보여야 한다. 성 동감한다. 차별화한다고 해서 이념적 성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이나 잘못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강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성한표 전 <한겨레> 논설주간
| |
■ [단독] “박원순 시장 영향력 차단”‘ 국정원 추정 문건’ 나왔다
■ 주진우 구속영장 기각…법원 “언론자유 한계 다투는 사건”
■ 대기업 인사팀, 취업특강서 여대생 외모지적 등 ‘갑질’
■ 치매 아내 4년 돌보던 80대 끝내…“이 길이 가장 행복” 마지막 동행
■ 미 경찰 “윤창중, ‘중범죄’로 다루지 않고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