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사실 공표 문제제기 없이
국정원이 흘린 내용 받아쓰기 바빠
“진보꼴통 본모습” “종북괴물” 막말도
사건 터뜨린 배경 분석은 안해
국정원이 흘린 내용 받아쓰기 바빠
“진보꼴통 본모습” “종북괴물” 막말도
사건 터뜨린 배경 분석은 안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 수사에 대해 언론이 국가정보원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유죄를 예단하면서 추측성 보도까지 남발하고 있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나 무죄 추정의 원칙, 취재·보도 준칙 등 법적·상식적 기준을 외면하는 ‘언론 재판’ 행태여서 “1980년대 언론을 보는 것 같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언론들은 압수수색은 범죄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수사의 초보 단계라는 상식을 외면한 채 초기부터 유죄의 예단을 하고 있다. 8월29일, 다수 신문들은 전날 국정원이 이 의원 등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벌인 사실을 전하면서 ‘국정원 관계자’ 등의 입을 빌려 “법원도 현역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해 줄 만큼 확실한 증거가 확보된 상태”, “법원도 범죄 혐의가 충분히 소명돼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했다”고 전했다. 압수수색영장이란 법원이 수사의 필요성에 동의해 발부하는 것일 뿐 혐의의 입증과는 거리가 먼 것인데도 법원의 권위에 기대 사건을 한쪽 방향으로 몰아간 것이다.
또 대다수 언론은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고민 없이 국정원과 검찰에서 밝히거나 흘린 혐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쪽에서 녹취록 내용이 한 대목씩 흘러나올 때마다 대서특필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런 태도는 <한국일보>가 이 의원이 강연을 한 5월 회합의 녹취록을 보도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별다른 근거를 찾아보기 힘든 추측 보도도 넘쳤다. 몇몇 언론은 이 의원의 집에서 발견된 현금에 러시아 화폐가 나왔다는 사실을 전하며 “특히 루블화가 포함된 점에 국정원은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해, 루블화가 북한과 관련된 공작금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 의원의 집에 ‘이민위천’(以民爲天)이라고 적힌 족자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두고 “김일성 북한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강조한 좌우명과 같다”며 북한과의 연계 가능성을 강조한 보도도 있었다. <채널에이> 등은 이 의원이 압수수색 당일 변장을 하고 도주했다는 국정원 쪽 말을 전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의원 등의 발언이 내란음모죄까지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법조계 등에서 벌어졌지만, 범죄를 기정사실화한 기사 제목과 내용은 잇따랐다. “이석기 의원, 총기 마련해 국가시설 파괴 모의”(<조선일보>), “국헌 문란 목적으로 내란 음모”(<중앙일보>) 등 인용문이지만 결과적으로 ‘혐의’를 ‘사실’로 확정하는 듯한 보도 태도가 이어졌다. <서울신문>은 5일 이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 소식을 전하면서 “헌정사상 첫 ‘내란음모 의원’”이라고 1면 머리기사 제목을 달았다.
한국신문협회의 ‘신문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은 “유죄가 확정되기 전 형사사건 피의자 및 피고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피의자 및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수사기관이 제공하는 피의사실은 진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특히 피고인 또는 피의자 쪽에 해명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 존중’이라는 선언도 “정치권 일각 ‘진보꼴통 본모습 드러나’”, “‘종북의 씨앗’까지 정리해야 끝난다”(이상 <동아일보>), “종북 괴물”(<문화일보>) 식의 표현 앞에서 무색해졌다.
반면 국정원이 공개수사를 벌이게 된 계기나 시점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던진 언론은 많지 않았다. 보수 신문들 중 조선일보는 8월29일치에 ‘다가오는 조직개편 칼끝… 국정원, 승부수 던졌다’라는 기사에서 이번 수사가 ‘선거개입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던진 승부수일 수 있다는 점을 다뤘지만, 국정원이 수사에 자신감을 보인다는 측면도 강조했다.
이희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언론이 수사기관만을 취재원으로 삼아 추측성 보도를 남발하는 등 ‘언론 재판’을 벌이고 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때처럼 선을 지키지 않는 언론의 추측성 보도가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이석기 체포동의안 통과 이후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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