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①
1960년 2월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것도 그냥 일요일이 아니라, 월말의 일요일이었다. 그때는 4월이 신학기여서 학년말의 휴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틀 전인 26일 갑자기 “이번 일요일에는 등교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학년말 시험을 앞당겨 치른다”는 것이었다. 3학년 선배들은 대학 시험을 치른 뒤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고, 봄방학도 곧 다가오는 터라 들떠 있던 우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요 등교’ 지시에 의아해했다.
나는 당시 대구 경북고 2학년생이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역시 정보에 빨랐다. 그들은 이날 저녁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를 열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반장에게 들으니 “대구의 모든 중·고등학생들에게는 등교 지시가, 대구의 모든 공무원과 노동자들에게는 특근 지시가 내려져 있다”고 말했다. 28일 오후 2시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대구 수성천변에서 선거 유세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학생과 공무원과 노동자들을 유세장에 못 가게 하려고 도에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교별 일요 등교의 명분도 요샛말로 하면 ‘개그 수준’이었다. 자유당 선거 유세 날인 27일은 오전 수업만 하고 하교시키고, 장면 유세 날이자 일요일인 28일에 경북고는 ‘기말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대구상고는 ‘졸업식 예행연습’, 대구여중은 ‘영화관람’을 위해 등교하라고 했던 것이다.
3월15일로 잡혀 있는 ‘제3대 정·부통령 선거’는 조병옥 민주당 후보가 병사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 후보가 되어버린 만큼, 민주당 장면 후보와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겨루는 부통령 선거가 선거운동의 핵심이 되어 있었다.
당시 경북고 학도호국단 부위원장은 2학년 대표 이대우였다. 이대우는 교장과 교감 선생님에게 ‘일요 등교 취소’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반공독재의 화신이 되어버린 이승만 정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선생님들이 뭐라 말씀하시든 28일 등교를 하지 말자, 일요일 하루 결석했다고 우리를 어쩔 것인가, 설마 퇴학까지야 시키지 못할 것 아닌가?”라고 수군댔다.
그런데 27일 오후 학생회 쪽에서 “28일 전원 등교하라”는 통보가 전달됐다. 우리는 “학생회가 뭔가 모의를 하고 있구나” 하고 직감했다.
당시 경북고 학생 수는 1학년이 480명, 2학년이 600명이었다. 마침내 28일 아침 학생 1000여명 가운데 800명 이상이 등교를 했다. 오후 1시 학생회에서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다. 나가보니 선생님들이 학생회 간부들을 단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고 학생들 일부가 선생님들의 만류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우 부위원장이 교정 단상에 올라가 두루마리에 쓴 글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교정이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고르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 그 촛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촛불’이 되리라.” “순결한 이성으로서 우리의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밑바탕으로 하여 일장의 궐기를 하려 한다.(…)”
성명서를 낭독한 이대우가 “일요 등교를 지시한 도지사에게 항의하러 도청으로 가고자 한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만나기로 했으니 우선 반월당으로 가자!”고 외쳤다. 우리 800여명은 행렬을 지어 반월당으로 달려갔다. 다른 학교 학생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대우가 다시 “우리라도 먼저 도청으로 가자”고 하여 우리는 학교에서 2㎞ 떨어진 경북도청 마당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도청 마당에서 “도지사 나와라”고 외치자 건물의 기왓장이 들썩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오임근 도지사가 우리 앞에 나타나자 이대우는 ‘성명서’를 다시 낭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이대우가 우리들 앞에서 낭독한 글이 ‘성명서’라는 것, 우리가 대구 시내를 누비며 함께 도청으로 달려간 것이 권력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수단 중 하나인 ‘데모’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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